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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비트코인① 한국 화폐 붕괴의 역사

기사입력 : 2023년09월11일 17:03

최종수정 : 2023년09월11일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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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제1차 긴급 통화조치
전쟁으로 폐허 된 한국, 제2차 긴급 통화조치
박정희 의장(대통령)의 제3차 긴급 통화조치
한반도 통일되면 원화 가치는 대 폭락? 왜?

[서울=뉴스핌] 한태봉 전문기자 = 한국 영화에서는 가끔 개인 금고에 5만원권 화폐를 가득 넣어 보관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테크 측면에서 보면 이런 보관 방식은 당연히 최악이다. 합법화할 수 없는 검은 돈이나 탈세 목적이 아니라면 은행에 입금해 3%의 이자라도 받는 게 정상적인 화폐의 보관 방법이다.

그런데 화폐는 과연 영원한 걸까?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를 쓴다. 일본은 엔화, 유럽은 유로화, 중국은 위안화를 쓴다. 한국은 당연히 원화를 쓴다. 흥미로운 건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영원한 화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장 먼저 한국 화폐의 붕괴 역사를 살펴보자.

◆ 6.25 전쟁과 제1차 긴급 통화조치

한국은 절묘한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역사적으로 주변국가들의 침략을 받는 일이 흔했다. 너무 먼 과거로의 역사여행은 자제하고 가까이에 있는 1900년도부터의 역사를 살펴보자. 1900년도 초반까지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화폐로 통용됐다.

그런데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조선왕조)이 망한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35년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통치했다. 이 시기에는 일본제일은행에서 발행된 '엔'과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 엔'이 화폐로 통용됐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됐다. 문제는 일본정부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 지던 1945년 8월의 패망 직전에 도쿄에서 황급히 돈을 엄청나게 찍어내 한국으로 공수해 온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발행된 화폐로 인해 한국의 총 화폐 유통량은 1개월만에 기존의 2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화폐의 유통량이 2배로 늘어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화폐가치는 폭락하고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이렇게 급조해 발행된 화폐들은 일본인들의 본국 귀향 자금으로 활용됐다. 또 친일 반민족행위자들과 한국에 있던 일본인 단체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살포됐다.

그 결과 한국 내의 물가폭등으로 이어져 몇 달 사이에 생활물가는 10배 가까이 폭등했다. 이 당시의 물가폭등으로 인해 한국의 수많은 서민들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 때 만약 화폐 대신 금을 가지고 있었다면 화폐가치 하락의 상당 부분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광복 이후 한국경제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는 조선은행권이 '원(圓)'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통용됐다. 이런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5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에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한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개전 3일만에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은 한국은행 본점을 점령한 뒤 지하금고에서 미 발행 조선은행권 '원(圓)'을 대량으로 발견한다. 북한군은 남한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이 화폐들을 불법으로 마구 발행해 버린다. 이로 인해 화폐가치는 다시 한번 급락했다.

그래서 이 당시 조선은행권을 가지고 있던 평범한 국민들은 본인들이 보유한 화폐 가치가 폭락하는 걸 다시 한번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물론 전쟁 중에 화폐가치가 폭락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 상황에서 위조지폐까지 유통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적군인 북한군이 불법으로 제조한 화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19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조선은행권 교환 및 유통에 관한 건"을 공포했다. 이는 기존의 '조선은행권'을 새로 발행한 '한국은행권'과 1대1로 교환하도록 하고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정지시키는 '제1차 긴급통화조치'였다.

기존의 '조선은행권'을 새로운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려면 필수적으로 신분확인이 필요하니 불법으로 조선은행권을 손에 넣은 북한군은 한국은행권으로의 교환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보통 화폐 개혁을 할 때는 디노미네이션(화폐 단위 절하)를 같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의 1차 화폐 개혁때는 1대1의 비율로 단순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 전쟁으로 폐허 된 한국의 제2차 긴급 통화 조치

이후 3년간의 기나긴 전쟁으로 경제는 폐허가 됐다. 한국정부는 막대한 군사비 조달과 파괴된 생산시설 복구비용으로 통화를 대량 남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화폐가치는 폭락했고 심각한 물가상승 압력에 시달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53년 2월 15일에 '제2차 긴급통화조치'를 발표하고 기존의 대한민국 화폐였던 '원(圓)'을 '환(圜)'으로 변경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앞의 '제1차 긴급통화조치'와 달랐던 부분은 교환비율이 1대1이 아니라 화폐 액면 단위를 100분의 1로 낮춘 '화폐 단위 절하[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였다는 점이다. 쉽게 설명하면 화폐단위를 '100원(圓)'에서 '1환(圜)'으로 변경해 화폐명칭도 바뀌었고 화폐 교환비율도 100대1이 됐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특정국가의 화폐가 어려움에 처하면 예외 없이 화폐단위 절하(디노미네이션)가 진행됐다. 6.25 전쟁 시절의 한국뿐 아니라 1차대전에서 패망한 독일, 최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까지 예외 없이 화폐단위 절하를 단행했다. 도대체 왜 '화폐단위 절하(디노미네이션)'를 하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일부 은행예금을 동결해 정부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한국정부는 '화폐개혁'과 동시에 은행예금도 일정 금액을 강제로 동결시켰다. 기존예금은 10만환(圜) 이상, 긴급통화조치로 예입된 구권예금은 3만환(圜) 이상을 대상으로 20~100%의 체증율을 곱해 특별 정기예금과 국채예금으로 전환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확보한 자금으로 통화증가 요인이었던 '유엔군 대여금'의 상환을 진행했다. 결국 통화량 급증을 억제해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저지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큰 폭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 표기의 숫자가 커짐에 따라 발생하는 경제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화폐단위를 절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하철요금이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1,000원에서 100만원으로 인상됐다고 가정해 보자. 옛날처럼 현금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면 100만원의 지하철요금을 현금으로 직접 지불하는 건 매우 불편할 것이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발생하는 계산과 지불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고액권을 발행하거나 아예 '화폐 단위 절하'를 단행하는 경우도 많다.

◆ 박정희 의장(대통령)의 제3차 긴급 통화 조치

우리가 만약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장롱을 뒤진 결과 한국 화폐 다발이 무더기로 나왔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그런데 그 화폐의 발행일이 만약 1960년이라면 그 화폐는 지금 시대에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정답은 사용할 수 없다.

한국에서 지금 사용되고 있는 '원(WON)' 화폐는 1962년 6월 10일부터 도입된 화폐다. 그래서 그 이전에 발행된 화폐는 한국은행에서 교환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런 화폐라면 화폐 수집상에게 팔아버리는 게 100배는 더 이득이니까 말이다.

한국 국민들이 정부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건 해방상황도 아니고 전쟁상황도 아니었다. 긴급한 상황에서의 어쩔 수 없는 정부의 긴급조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평온했던 시기의 난데없는 '화폐개혁'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은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 의장(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부가 집권했다. 이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산, 투자, 소비 등의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예금 이탈이 진행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962년. 침체된 경제활동 때문에 안정적인 정권 유지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재정적자와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 계속 심각해지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6월 9일 밤 10시에 '제3차 긴급통화조치'를 발표했다. 박 의장은 부정축재와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의 투기화를 막고, 악성 인플레를 방지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게 바로 1962년 6월 10일의 '제3차 긴급통화조치'다.

 화폐 개혁의 핵심은 '환(圜)'에서 '원'으로 단위를 바꾸고, 10대 1의 비율로 절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구당 교환할 수 있는 돈이 최대 5,000환(圜)에 불과했다. 원화로는 500원이다. 그 이상의 돈은 은행에 의무적으로 저금한 뒤 6개월에서 1년 후에 찾을 수 있었다. 또는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연 15% 배당 보장)으로 바꿔야 했다.

그런데 구권을 신권으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은 발표 이후 고작 7일에 불과했다. 전 국민이 7일안에 이 모든 걸 처리하는 게 과연 가능하긴 한 걸까? 개인의 사유재산을 상당히 침해하는 억압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 당시는 전쟁상황이 아니라 평시 상황이었다.

이 발표로 경제 현장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바로 월요일 새벽부터 은행에는 화폐를 교환하기 위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일선 상점에서는 '구 화폐'를 받지 않거나 물건가격을 크게 올렸다. 아예 문을 닫은 상점도 많았다. 한국경제는 더욱 더 침체됐다.

그런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왜 기습적으로 '화폐개혁'을 진행하며 무리수를 둔 걸까? 화폐개혁을 하면 부정하게 재산을 모은 사람들과 중국 화교들이 엄청난 규모로 숨겨둔 돈을 '신 화폐'로 바꾸려 할 것이고 이 때 강제로 예금으로 묶어서 국가의 부족한 재정적자를 메우고 산업자금으로도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1962년의 통화개혁은 한국은행 총재 등 관계 당국자와의 사전협의도 없이 극비리에 진행됐다. 신은행권은 정부가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사에 비밀리에 발주해 제조했고 6월 9일 중앙정보부와 군의 도움을 받아 한국은행 본지점으로 현송됐다. 실무작업을 주도했던 공무원들은 비밀유지 각서를 쓰고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게 진행된 '통화개혁'의 기존 '환(圜)화' 회수내역을 보면, 100만 환(신화 10만 원) 이하의 소액이 90.5%를 차지했고 1억 환(신화 1천만 원)을 초과하는 예입은 총7건으로 12억 환에 불과해 당초 정부의 예상과 달리 여유자금의 현금 보관규모는 미미했다. 결과적으로 부정축재를 통해 숨겨진 돈의 규모는 많지 않았던 셈이다.

또 중국 화교들의 경우 이미 중국 정부에게 몇 번의 뒤통수를 맞은 경험들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금을 선호해 왔다. 이런 이유로 중국 화교들은 돈이 생길 때마다 화폐 대신 '금'으로 바꿔서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원대한 포부와 달리 화폐개혁의 효과는 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화폐개혁으로 인한 경제 현장의 극심한 대혼란과 미국의 우려까지 전달돼 군사정권의 예금봉쇄 정책은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1개월 뒤인 7월 13일에 봉쇄예금 동결을 해제했다. 이로써 기습적인 통화개혁은 지하자금의 산업자금화, 인플레이션 방지 등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부작용만 남긴 채 초라하게 끝났다.

1962년의 화폐개혁 이후에 한국 국민들은 현금자산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15% 이자율(현재 시점에선 고금리지만 그 당시는 물가상승률이 매우 높았다)의 은행예금을 기피하고 토지와 주택 구입 등 실물자산 투자로 돌아섰다. 한국 국민들의 부동산 사랑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화폐는 안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국가의 필요나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화폐개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종잇장처럼 화폐가 사라질 수도 있다. 아무리 군사정권 시절이라지만 7일안에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지 않으면 휴지가 돼 버리는 정책은 공포스럽다.

물론 정부가 화폐를 강제로 뺏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통 화폐개혁을 할 때는 '구 화폐'를 '신 화폐'로만 바꿔주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다. 1명이 교환할 수 있는 돈에 상한선을 두고 그 이상의 돈은 은행에 강제적으로 예금시켜 버린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개인 재산권 행사에 굉장한 침해를 받게 된다.

1962년의 화폐개혁으로 변경된 화폐 '원'이 지금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는 바로 그 '원화'다. 화폐개혁 이전인 예전의 원[圓]과 구별하기 위해 지금의 '원'은 한글로만 표기하고 영문 표기는 'WON'이다. 한국 화폐 '원(WON)'의 역사는 고작 60년에 불과하다.

◆ 한반도가 평화통일 될 경우 한국 화폐 '원'의 가치는?

이제 오래 전 우리의 소원대로 한반도가 평화통일 되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미래에 북한과 남한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확률은 낮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글로벌시장에서 유명한 투자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짐 로저스'는 2013년에 국제시장에서 북한화폐를 대거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짐 로저스'는 왜 북한화폐에 투자했을까? 만약 남북통일이 될 경우 한국이 충분히 보상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짐 로저스의 투자를 이해하려면 동독과 서독의 통일 사례를 살펴보면 된다. 1990년 독일의 통일 당시 서독과 동독은 각자가 발행한 마르크(mark) 화폐를 썼지만 교환비율은 달랐다. 국가재정이 취약했던 동독의 화폐는 암시장에서 서독화폐의 4분의 1에 교환되고 있었다.

하지만 서독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서독 사람들이 희생하더라도 동독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통일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동독과 서독 마르크의 교환비율을 1대1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동독사람들은 엄청난 이득을 봤다. 추가로 발 빠르게 암시장에서 동독 화폐를 대거 매입했던 서독 투자자들도 4배의 이익을 얻게 됐다. '짐 로저스'가 노리는 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다면 현재 북한 화폐의 상황은 어떨까? 북한은 2009년에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전격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화폐개혁 이후인 2023년 현재 기준으로 '북한 원'의 환율은 1달러당 약 8,000원 내외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원∙달러 환율 1,300원과 비교하면 화폐가치가 6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짐 로저스'는 혹시 평화통일이 되면 한국이 독일처럼 화폐 교환비율을 1대1이나 1대2로 너그럽게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굳이 가능성을 따져보면 한반도의 평화통일보다 북한이 한 번 더 화폐 개혁을 단행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북한의 경제상황이 여전히 심각하게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이 다시 한번 화폐개혁을 진행하면 구권을 가지고 있는 '짐 로저스'는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짐 로저스의 명성은 세계적이지만 그가 과연 '북한 화폐'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결론적으로 확률은 희박하지만 먼 미래에 남북 통일이 됐을 때 한국 정부가 과거 독일처럼 북한과의 화폐 교환비율을 너그럽게 가져가는 결정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원화를 보유한 한국 국민들은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일부자산은 원화보다 달러로 보유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미래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른다. 과거 6.25 전쟁을 겪었던 한국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던 독일, 최근의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까지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화폐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달러는 기축통화이긴 하지만 그 역시 신용화폐이자 종이화폐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화폐붕괴의 보험성격인 '금'이나 '비트코인'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기도 하다.

 

②편에서 계속… 비트코인② 독일 화폐 붕괴의 역사…나락 간 베네수엘라 화폐

 

자세한 내용은 해당 영상을 통해 확인해 보자.

뉴스핌 (촬영 : 조현아 / 편집 : 문소희)

longinu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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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만 남기고... 노만석 '떳떳하게' 퇴임 [서울=뉴스핌] 김지나 김영은 기자 = 노만석(54·사법연수원 29기) 검찰총장 직무대행(대검찰청 차장검사)이 '대장동 항소 포기' 사태로 논란이 확산되자 14일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퇴임사에서도 논란의 핵심인 항소 포기 과정에서의 '윗선 압력' 의혹에 대한 진실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날 노 대행이 한 언론과 진행한 인터뷰 기사에서는 항소 포기 결정에 구조적 압력이 있었음을 시사해 퇴임 이후에도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항소 포기' 정쟁 한가운데 세워놓고...'외압 의혹'엔 입 닫은 퇴임사 이날 오전 10시 30분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노만석 직무대행의 퇴임식이 진행됐고, 약 30분 후인 오전 11시경 퇴임사가 공개됐다. 특히 관심을 모은 대목은 대장동 개발비리 사건 항소 포기 과정에서 법무부 외압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노 직무대행이 퇴임사를 통해 해당 의혹의 진실을 밝힐지 여부였다. [서울=뉴스핌] 김학선 기자 =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항소 포기 논란 끝에 사표를 낸 노만석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비공개 퇴임식을 마치고 차량을 타고 대검 청사를 나서고 있다. 2025.11.14 yooksa@newspim.com 하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은 퇴임사에 없었다. 항소 포기와 관련해 퇴임사에서 언급된 부분은 "최근 일련의 상황에 대하여 검찰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검찰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저 스스로 물러나는 만큼, 일각에서 제기되는 검사들에 대한 징계 등 논의는 부디 멈추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항소 포기 과정과 관련된 내용은 공식적으로 공개된 퇴임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전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상황과 자신의 입장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인터뷰에서 노 대행은 "정권하고 검찰이 방향이 같았으면 무난했을 텐데 솔직히 지금은 (정권과 검찰이) 완전히 역방향"이라며 "검찰청을 폐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결이 다른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법무부가 항소 포기를 압박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모든 것은 나의 결정"이라고 밝혔다. 노 대행은 "윗선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경우 선택지는 끝까지 맞서 싸우든가 받아들이든가 딱 두 가지"라며 "(윗선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건 내 생각이고 내 결정이 됐기 때문에 이제 와서 외압을 받았다는 건 우스운 이야기"라고 말했다. 윗선에서 항소 포기를 요구했고 자신은 항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생각이 달랐지만, 끝까지 맞서 싸울 수 없었다는 점을 내비친 대목이다. 노 대행은 또 자신의 결정은 조직을 위한 일로 떳떳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표를 쓴 날 아침 출근길에 왜 지하가 아니라 기자들이 모인 출입문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아느냐"고 반문하며 "조직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고, 그래서 떳떳했기 때문에 정문으로 출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퇴임식에서도 노 대행은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고 퇴청했다. ◆ 與 이참에 '검찰파면법' 강행... "내부 우려를 항명으로 보는 것 안타까워"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더불어민주당 문금주•백승아•김현정 원내대변인(오른쪽부터)이 14일 국회 의안과에 검찰청법•검사징계법개정안을 제출하고 있다. 2025.11.14 pangbin@newspim.com 노만석 대행은 스스로 '대장동 항소 포기'에 책임을 진다며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항소 포기 외압 논란이 정쟁으로 번진 만큼 검찰 조직은 외풍에 더욱 크게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곧바로 검찰총장을 포함한 검사를 탄핵 절차 없이 일반 공무원처럼 파면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검찰청법 개정안('검사 파면법')을 발의했다. 민주당은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들을 '정치검사'로 규정하며 '검사 힘 빼기'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일 노만석 대행이 서울중앙지검 지휘부와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의 항소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항소 불허 지휘를 한 이후, 전국 검사장 18명은 노 대행에게 항소 포기 경위를 설명하라고 요구했고, 참모진인 대검 부장(검사장)들까지 노 대행을 찾아가 사임을 요구한 바 있다. 노 대행은 이에 대해 퇴임사에서 "검찰 구성원들이 검찰의 기능과 정치적 중립성 등에 대한 전반적인 우려를 내부적으로 전한 것임에도, 이를 항명이나 집단행동으로 보는 일부 시각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는 조희영 전주지검 인권보호관이 글을 올려 "검사의 징계를 일반 공무원보다 엄격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며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대한 검찰 내부 반발을 '정치 검사들의 항명'이라고 규정하고, '검사들의 반발을 가용한 법적·행정적 수단을 총동원해 저지·분쇄하겠다'며 발의한 법안이 '검사 파면법'이라고 한다"고 비판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유사 입법으로 검사 파면을 강화해도 실질적으로 검찰 업무의 성격상 파면 요건에 해당할 만한 사례가 많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조직 독립성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위축될 수 있다"면서 "이번 법안은 당장의 정치적 시그널이나 검찰 견제 성격이 강하고, 실무적으로는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검찰의 반발을 무조건 정치적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우려했다.  abc123@newspim.com 2025-11-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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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왕수복, 광대 조건 다 갖춘 인물"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신개념 국악 방송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의 2-1편이 19일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스팟(K·SPOT)'을 통해 공개됐다. 앞서 제1화에서는 올해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준비됐다. 제1화 '광복'에서는 제1편 '작금'을 시작으로 2편 '김구, 판소리 배우다', 3편 '이승만과 아리랑', 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제2화는 '기생'을 주제로 다루며, 이날 2-1편에서는 '왕수복, 기생이 되다'를 주제로 한 내용이 공개됐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왕수복은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나 2003년 사망했으며, 조선 민요를 세계에 알렸던 기생이기도 하다.왕수복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성격은 쾌활하고 명랑했다고 한다. 당시 잡지 '삼천리'에서는 '왕수복의 목소리가 청아했다',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를 잘 표현했다'고 평했다. 평안남도 강동군 입성면 남경리에서 태어난 왕수복은 , 화전을 일구는 농사꾼의 4남매 중 셋째다. 아버지가 이름을 '성실'로 지었으나 할머니가 '수복'으로 바꾸었고, 훗날 불같은 사랑을 나눈 소설가 이효석은 왕수복을 '실'로 불렀다. 변사로 나선 변상문 이사장은 왕수복에 대해 "그 당시 언론에서 표현하기를 '목소리가 청아했다',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인 한을 아주 잘 표현했다'라고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7살 어린 나이에 부잣집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주는 일을 했다. 그때 풍금 소리를 듣고 마음 속에 내재된 소리를 하게 되고, 이를 듣게 된 선생님의 추천으로 명륜 여자 공립 보통학교에 다니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변 이사장은 "가난해서 3년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이후 어머니한테 기생을 권유받고, 기생 권번에 입학하게 됐다. 그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소리'였다. 가곡, 민요, 시조, 판소리 등을 배웠다"고 소개했다. 최한이 소리꾼은 "정가(가곡·시조), 민요, 판소리 등이 전통음악의 3대장이다. 저는 국악 중·고등학교를 통해 정가를 배웠는데, 변사님은 알고 계시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변 이사장은 "시조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구 장단에 맞춰서 부르는 것이고, 삼현육각 제대로 깔고 부르면 가곡이 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최 소리꾼은 "'가난'이라고 말하신 것은 개그인 걸 알고 있다. 삼현육각 편성 유무에 따라 정가가 나뉘기도 한다"라며 "시조는 한시와 고시를 가지고 운율을 붙여서 부르는 노래로, 사랑방 음악이라고도 불린다"고 설명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이어 "맑은 소리는 경기 민요, 한의 정서는 판소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진도 아리랑' 한 구절을 가창했다. 그러자 변 이사장은 "우리 음악은 애이불비(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않다는 뜻)하고 낙이불류(즐거워도 지나치게 들뜨지 않다라는 뜻)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절제의 미악이 바로 우리의 소리"라고 정의했다. 또한 변 이사장은 "왕수복은 이렇게 노래뿐만 아니라 춤, 거문고, 가야금, 해금 등 악기도 배웠다"고 말했다. 이에 최한이 소리꾼은 즉석에서 가야금 연주를 선보였다. 이후 최한이는 광대(조선 말 소리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에 얽힌 판소리를 가창하며 "광대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인물치레, 두 번째 말 잘하는 사설치레, 그리고 다음이 득음이고 춤"이라며 "왕수복은 이를 다 갖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alice09@newspim.com 2025-11-1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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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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