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 약세, 일방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운 지점 왔다
[뉴스핌=김사헌 기자] 일본 엔화는 지난해 11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윤전기 발언 이후 미국 달러화에 대해 14% 평가절하 됐다. 유로화 대비로는 무려 18%나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이제 외환전문가들의 관심은 엔화 약세가 과연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 하는데 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일본 엔화는 이제 더이상 일방적인 약세를 보이기 힘든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외환전문가들이나 경제분석가들은 엔화가 추가 약세를 보일 수는 있지만 한계지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달러/엔이 이미 90엔까지 올라와 100엔 선으로 접근 중이고, 유로/엔은 120엔을 지나 유럽 당국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직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그 동안 엔화가 상대적으로 고평가가 된 상태로 보았기 때문에 환율전쟁이라거나 환율 조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올들어 주요통화 대비로 미국 달러화지수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당국으로서는 큰 우려 사항이 아니다.
미국은 게다가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어 '경기침체' 위험을 나라 밖으로 팔아대는 평가절하 경쟁에 나서지 않아도 좋은 입장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하반기에 미국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면 연준의 완화정책도 변화되고 이렇게 되면 달러화가 다시 강세 통화가 되기 전에 미국으로 자금이 유입될 수 있다고 본다.
게다가 유로존 여건이 아직 불확실하고 일본의 부양책이 성공할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안전도피 움직임을 달러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엔화의 일방적인 약세가 힘들다는 것은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통해 입증됏다. 지난주 일본은행(BOJ)이 물가 안정목표를 2%로 높이고 무제한 양적완화를 실시한다고 밝혔을 때 시장의 반응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예상보다 강력한 정책 결정이었지만 엔화는 급격한 강세를 보여 시장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돌이켜 보면 전 세계 외환시장 참가자들은 BOJ가 2014년부터 무제한 완화정책을 실시하는 정도로는 2% 물가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 외환시장, 신임 BOJ 총재 오기 전 G20 레토릭에 주목
시장에서는 아마도 4월에 시라카와 마사아키 중앙은행 총재에 이어 새로운 공격적인 마인드를 갖춘 총재가 올 때 더 강력한 추가 완화책을 들고 나올 것을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4월에 앞서 2월 중순에 주요 20개국(G20) 회의가 예정되어 있고, 여기서 일본의 엔 약세 정책이 도마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25일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우리가 환율을 조작하고 있다는 비난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발했다. 전날까지 다보스포럼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일부 지도자들이 일본 엔화 약세 정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뒤의 일이다.
특히 메르켈 총리는 주요 20개국(G20)에서는 환율의 정치화 혹은 조작을 가장 중대한 이슈로 삼고 있다는 점을 환기했다는 점에서 아소 재무상의 발언은 비장해 보인다. G20에서 자신들의 정책을 도마에 올리지 않고 싶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메르켈의 입장은 독일 외환당국의 공식입장이 아니며 G7과 G20 회의용 발언이다.
앞서 독일 재무부 대변인은 유로/엔 환율의 최근 변화폭에 대해 "최근 몇년 동안 환율의 변화를 감안하면 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경쟁적 평가절하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 전에 옌스 바이트만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가 다보스포럼에서 "일본 정부의 중앙은행에 대한 압력은 환율의 정치화"라고 발언한 데 대해서도 독일 재무부는 "우리의 경우 중앙은행과 정부가 서로 독립적이고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피해갔고, "이런 종류의 쟁점은 G7이나 G20에서 다룰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재무성 고위 관계자들은 바이트만 총재의 발언에 대해 "독일이 누굴 욕하냐"고 최강수로 맞섰다. 아마리 아키라 경제상은 파이낸셜타임스를 통해 "독일은 유로존의 고정환율제도로 가장 득보는 수출국가로, 비판할 입장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사실 일본만 자국 통화 약세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미국이 수차례 양적완화를 통해 암묵적으로 달러 약세를 용인한 바 있고, 스위스는 공개적인 개입을 통해 프랑화 강세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호주와 한국 등 할 것 없이 주요국들은 모두 자국통화의 상대적인 강세 억제 혹은 약세를 원한다.
◆ 미국, 균형환율론 들고 나올까
문제는 환율의 속성에 있다. 어떤 나라 통화가 약세를 보이면 반드시 상대변 통화는 강세를 보이게 되며,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실은 '불가지론'에 속하는 균형 환율이 등장하게 된다.
G20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아직 엔화 약세 정책에 대해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실상 침묵인데, 일본과 독일이 설전을 벌인 이후라 수습이 필요해 보인다.
미국 중앙은행 당국자들은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양적완화 정책이 도를 넘은 것이 아니며, 아직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벤 버냉키 의장과 스탠리 피셔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재무부의 입장은 다를 수가 있다. G20의 화두를 정리해야 하는 미국 재무부는 예의 "균형환율"을 들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즉 모든 나라에 대해 시장개입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환율에 비해 고평가된 나라는 자국통화 가치 하락 정책을 사용하고 그 반대로 저평가된 나라는 평가절상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맞다는 것이 미국 재무부의 태도다.
아마도 2월 중순 열리는 G20에서는 환율 문제가 다시 한번 서울 G20 회담 이래 가장 주요한 의제로 부상할 수 있겠지만, 위와 같은 '균형환율'론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 G20은 이 같은 테제 외에는 과도한 변동성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문을 다시 외울 것 같다.
주요 국제기구는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 국가와 적자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흑자국이 적자국의 정책에 대해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미국 재무부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는 독일 재무부의 입장이 이해가 된다. 비록 중앙은행 총재나 총리가 환율전쟁에 대해 우려한다고 해도 대규모 수출국이면서 경상흑자국인 독일의 외환당국이 이를 쟁점화하기는 어렵다. 한국도 2012년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으며, 자구책을 구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국제기구는 또한 환율 전쟁 우려가 과장됐다면서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봉쇄할 것으로 보인다.
◆ 환율전쟁, 아직 발생한 게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주 브리핑을 통해 최근 불거지고 있는 일본의 대규모 완화정책에 따른 환율전쟁 논쟁에 대해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무제한 완화정책이 이른바 '근린 궁핍화 정책'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블랑샤르 수석은 개별 국가가 경제 회복을 위해 적절한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면서 "이런 정책은 IMF가 판단했을 때 적절한 정책이어야 하며 여기에는 환율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될 수밖에 없다"고 일본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다.
다만 그는 "선진국들의 경제 회복 노력에도 아직 신흥국으로의 자금 유입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만약에 자금 유입이 지나치게 늘어난다면 신흥국들은 이를 적절히 통제하면 될 것것"이라고 주장했다.
민간 외환전략가 일부도 비슷한 근거에서지만 최근 환율 변동을 '제한적인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브라운 브러더스해리먼(BBH)의 마크 챈들러 수석 외환 전략가는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금리 인상 시점을 조율하거나 금리를 인하하고 있으며 신흥시장 역시 자국의 통화 절상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같은 행보는 변동환율 하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평가절하를 원한다고 해서 캐나다나 영국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실질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아니며, 일부 국가가 자국 통화 절상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인하하더라도 이는 조정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챈들러는 또 일본은 무역 흑자 구조에서 적자 구조로 변하고 있다며 지난해 2월 이후 계절적 요인을 반영하면 월간으로 무역 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또 OECD의 계산에 따르면 통화 구매력평가 기준으로 엔화는 아직도 약 14.6% 과대평가된 상태라는 점도 강조했다. 앞서 미국의 '균형환율론'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챈들러는 "일본 정부 당국자들이 엔 약세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 일본 당국이 엔화의 영구적인 평가절하 혹은 심지어 과도한 평가절하에 대한 우려를 차단하기 위해 사용한 수사 어구에도 주목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환율전쟁'이라는 자극적인 쟁점은 쉽게 금융시장이나 정책 당국의 입에서 빠져나갈 것 같지 않다.
억만장자 투자자인 조지 소로스는 "환율전쟁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해도 잠재적인 최대 위협요인"이라면서, "특히 독일이 이로 인해 경기침체나 경기둔화를 경험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이클 울포크 뱅크오브뉴욕-멜론의 선임외환전략가는 "환율전쟁이 이미 현실이며 갈수록 큰 쟁점이 될 것"이라면서, "엔화가 추가 약세를 지속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울포크 전략가는 "한국이나 대만 등 다른 나라에게 이 문제는 매우 고통스러운 주제이며 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적인 주제"라고 강조했다.
[뉴스핌 Newspim] 김사헌 기자 (herra7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