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 예산실 있어도 심의 확정 의회 권한
청와대에 예산실 두려면 국회 역량 확보돼야
국회, 대통령 입맛대로 '거수기' 변질 우려도
[세종=뉴스핌] 오승주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연일 '기획재정부 해체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미국은 백악관에 예산실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후보는 18일 "미국은 백악관에 예산실이 있다"며 "(이제) 그런 것도 고려할 때가 됐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기재부가 예산 권한으로 다른 부처의 상급기관 노릇을 하고 있어 예산 기능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데 이은 발언이다.
◆ 백악관에 예산실 "맞긴 한데"···미국, 의회가 예산 승인 전권 행사
이 후보는 최근 방역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전국민 추가 재난지원금'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기재부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후보는 불편한 심기를 '기재부 해체'와 대통령이 될 경우 '청와대 산하 예산실 설치'로 드러낸 셈이다. 국가 예산을 청와대가 쥐고 대통령 뜻대로 예산권을 집행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한 것이다.
이 후보의 발언처럼 미국은 예산을 행사하는 정부조직이 따로 있지 않고 백악관에 예산실이 있어 대통령이 예산편성을 좌우할까.
[서울=뉴스핌] 최상수 기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민주당 정당쇄신, 정치개혁 의원모임' 간담회에서 머리발언(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1.11.18 kilroy023@newspim.com |
일단 이재명 후보의 발언이 맞다. 미국은 현재 한국의 기획재정부나 노무현 정부 때 기획예산처와 같이 국가예산을 직접 짜고 주도하는 정부 부처가 없다. 백악관에서 예산을 편성한다. 관리예산실(OMB Office of Management and Budget)이라고 부른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2020년 7월 발표한 '의회예산과정의 고찰'(김종면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미국의 예산제도는 전세계적으로도 독특하게 의회에 편중돼 있다. 미국 헌법은 18세기말(1787년) 제정돼 근대적 예산개념이 정립되기도 전에 의회에 예산관련 전권을 부여했다.
그런데, 미국은 실제로 '예산의 모든 권한'을 의회가 쥐고 있다. 백악관에 예산부처가 있긴 해도 '의회에 제출'만 할 뿐이다. 이를 '대통령 예산'이라고 한다.
의회에 제출된 '대통령 예산'은 말 그대로 '가안'이다. 의회가 '대통령 예산'을 이리저리 뜯어 고쳐 수정할 수 있다. '수정 결정'된 의회 예산이 본예산이 된다.
대통령이 의회의 예산 수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부권 행사'다. '전부 거부권'만 행사되기 때문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음해 예산안 전체가 '무용지물'이 된다. 한국처럼 예산안이 통과하지 못할 경우 전년에 준해 집행하는 '준예산'도 없다.
그냥 예산이 없어 행정부가 '마비'된다. 가끔씩 뉴스를 통해 들리는 미국정부의 '셧다운'이 이같은 경우다. 예산안이 의회에서 다시 가결될 때까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시 말해, 의회가 결정한 예산안을 거부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미국 연방정부 예산 편성 과정 [자료=코트라] 2021.11.19 fair77@newspim.com |
◆미국 CBO, 실질적 예산실 역할로 여겨질 정도
올해 3월 한국비교정부학보에 게재된 'OECD 주요국 의회의 재정 권한과 실제'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예산편성권을 가진 미국 의회는 의원들에게 예산 관련 전문성을 가진 직원들이 배치돼 예산입법을 돕는다.
미국 의회는 세출예산의 경우 예산위원회(상원․하원 각각)와 세출위원회(상원․하원 각각)가 담당한다. 세입예산은 재정위원회(상원)와 세입위원회(하원)가 맡는다.
미국 의회의 예산관련 위원회를 지원하는 인력은 82명(2019년 기준 상원 47명, 하원 35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무엇보다 의회 내 설치된 미국의 독립적 재정기구인 의회예산처(CBO, Congressional Budget Office) 역할이 크다. 사실상 국가의 '예산실'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의회예산처는 1974년 설치돼 예산과 경제에 대해 당파를 떠나 분석 정보를 의원들에게 제공한다. 미국 의회가 연방예산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고, 전문성 강화에 기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미국은 '대통령 예산안' 심의기간이 8개월에 달한다. 정치제도가 대통령제로 동일한 국가인 한국(3개월)과 멕시코(3개월), 칠레(2개월)와 비교해도 상당히 길다. 대통령의 심기를 맞추는 '즉흥적 예산 편성'이 이뤄지기 힘든 구조다.
[서울=뉴스핌] 이형석 기자 =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2021.11.09 leehs@newspim.com |
◆ 한국도 헌법·법률에서는 '깐깐 심사'…실제는 '글쎄'
물론 한국도 예산처리에 관해서는 여러 단계와 제도를 두고 깐깐하게 심사하게 돼 있다.
기획재정부가 마련한 정부 예산안이 국회로 이송되면 국회가 이를 심의하고 의결해야 한다.(헌법 54조). 국회로 옮겨진 정부 예산안은 심사 과정에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와 각 소관위원회가 논의를 거쳐야 하고, 심사가 끝나면 본회의에 부의해 통과해야 확정된다.
미국과 다른 점은 헌법 제57조다. 의회가 백악관이 제출한 예산안에 대해 마음대로 '칼질'을 할수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은 '국회는 정부의 동의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
정부의 예산안에 국회의원들이 마음대로 손을 대려면, 정부의 동의를 받도록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의원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예산안이 누더기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국가의 세입 세출은 일반적인 가정의 수입 지출과 다르다. 가정에서는 들어오는 돈(수입)의 규모를 고려해 나갈 돈(지출)을 맞춰 쓴다. 모자랄 것이 예상되면 허리띠를 졸라 매는 방향으로 수입에 맞춘 지출을 판단한다.
하지만 국가는 반대다. 나갈 돈(예산)을 먼저 정해두고, 들어올 돈(세수)은 나중에 고려한다. 모자라는 금액은 국채를 발행한다. 국채 발행은 나랏빚이다. 언젠가는 국민이 갚아야할 돈이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국회에서 마음대로 예산을 좌우할 수 없도록 정부 동의를 거치게 하는 조항을 헌법에 뒀다. 그만큼 재정건전성에 방점을 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재명 후보가 주장하는 '백악관처럼 청와대에 예산실'을 두려면 '국회의 예산심사 기능'이 탁월해야 한다. 정부는 '청와대 예산'을 국회에 그냥 보내고, 국회에서 송부된 예산을 빈틈없이 심사해 처리해야 순기능이 작동한다. 국회의 예산 편성 및 관리 능력이 확보돼야 하는 것이다.
현재 국회 상황에서는 예산안을 전문성있게 살펴볼 인력과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자칫 '청와대 예산'의 거수기로 전락할 우려도 있고, 한국적 정치상황에서 국회에 예산 맡겨두면 '고양이에게 생선 맡겨둔 꼴'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fair77@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