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장 극비 방북 자료 등 포함
남북 밀사들 박정희·김일성 각각 만나
北, 합의 1년 만에 DJ납치 핑계로 파탄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남북 당국 간 첫 합의인 7·4 남북 공동성명(1972년)을 이끌어 내기 위한 막후 비밀 접촉과 성사 과정을 보여주는 회담 사료가 6일 공개됐다.
통일부는 1971년부터 11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정치 분야 남북회담 문서를 2권(총 1678쪽)의 책으로 만들어 언론에 배포했다.
1972년 5월 31일 서울을 극비리에 방문한 박성철 북한 부수상이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다. 박 대통령 왼편이 박성철, 오른편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사진=통일부 제공] 2023.07.06 |
비밀에서 해제된 회담 사료는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전 비밀접촉(11회, 1971년 11월∼1972년 6월) ▲7·4 남북 공동성명(1972년 7월)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 회의(3회, 1972년 10∼11월) ▲남북조절위 회의(3회, 1972년 11월∼1973년 6월) ▲남북조절위 부위원장 회의(10회, 1973년 12월∼1975년 3월) 등의 추진 및 진행 과정과 회의록이다.
이에 따르면 7·4 남북 공동성명 합의를 위한 접촉은 분단 이후 첫 당국 간 논의라는 점에서 남북 간에 극비리에 진행됐는데, 먼저 1972년 3월 정홍진 회담운영부장이 평양을 방문하고 그 다음 달 김덕현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이 서울을 답방함으로써 궤도에 올랐다.
이어 같은 해 5월 박정희 정부 시절 최고 실세인사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과 회담했고, 김일성과도 두 차례 만났다.
당시 이 부장은 평양 주암 초대소에서 열린 김영주와의 첫 회담에서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 친한 친구가 말렸지만 방북했다"며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안 오리라 생각했지요"라고 묻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부장은 "나는 오리라 생각했습니다"고 응수하면서 "시작이 반이라고 우리가 마주 앉으니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72년 5월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이 북한 김일성과 만났다. [사진=통일부 제공] 2023.07.06 |
이 만남에 이어 같은 달 29일에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에서 이후락 부장과 만났고,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수순으로 진행됐다.
이후락은 당시 박성철을 만난 자리에서 "어제까지 공산당 잡던 두목이 북한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적인 역사과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북 양측은 고위 비밀접촉에서 합의한 내용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성명 형식으로 동시에 발표했다. 여기에는 자주, 평화, 민족단결 등 '조국통일 3대 원칙'이 천명됐다.
북한은 성명 발표 9일 후인 7월 13일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열린 실무접촉에서 "그쪽에서 김종필 총리가 가장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남측에 불만을 토로한 사실도 회담 사료로 드러났다.
북한은 이후 남북조절위 회의 등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면서 회담을 난항에 빠지게 했다.
특히 이듬해 8월 28일 한국 내 문제인 김대중 납치 사건을 트집잡아 남북조절위 회의를 일방적으로 파탄냈다.
통일부는 앞서 지난해 남북대화 사료집 제2∼6권을 공개한 바 있다.
이번 회담 사료 공개에는 이후락·김일성 면담 내용과 박정희·박성철 면담 기록은 포함되지 않았다.
상세한 남북회담문서 목록과 열람을 위한 절차 등은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인터넷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