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스 美 부통령, 15일 文 대통령과의 면담서 비핵화 용어 변경
백악관 보도자료에 FFVD, 펜스 부통령 발언 때 CVID로 바뀌어
정세현 "미국 관료 다시 CVID 사용, 25년 전으로 복귀한 것"
"美, 북한 비핵화 협상을 리비아 방식으로 끌고 갈 가능성"
[싱가포르·서울=뉴스핌] 채송무 이고은 기자 =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북한의 비핵화 조건으로 CVID(완전하고 불가역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언급해 주목된다.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현지시간으로 15일 오전 10시 20분께 면담을 가진 펜스 부통령은 이 자리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이곳 싱가포르에서 열린 역사적인 회담과 남북 정상회담들은 우리의 목표인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위한 의미있는 진보를 상징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펜스 부통령 발언 원문 : I’m very grateful for your generous comments about president’s leadership and the historic summit that took place here in Singapore and the meetings that have taken place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over the past year we believe represent meaningful progress for achieving our objective of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사진=청와대] |
◆ 사전 배포한 보도자료엔 FFVD, 文 대통령과 만난 자리서 CVID로 바꿔 언급
펜스 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최근 미국의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조를 바꾼 것이어서 의미심장하다.
에컨대 펜스 부통령의 CVID 언급은 문 대통령과의 면담 직전 바뀐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문 대통령과의 양자면담을 앞두고 미국 백악관이 공개한 보도자료에는 펜스 부통령과 문 대통령의 면담에 대해 "두 나라의 공통 목표인 북한의 최종적이고 검증된 비핵화(FFVD)를 달성하고,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양국의 지속적인 노력을 논의했다"고 명시돼있다.
(백악관이 제공한 보도자료 원문 : They also discussed the ongoing efforts to accomplish our two countries’ mutual goals of achieving the 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 as agreed to by Chairman Kim, and establishing a permanent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백악관이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CVID가 아닌 FFVD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면담에 나선 펜스 부통령의 발언은 CVID로 바뀌었다. 불과 몇 시간만에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조건을 명시하는 용어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15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 北 비핵화 조건, FFVD vs CVID 어떻게 다른가
미국은 전통적으로 비핵화 조건을 CVID로 호칭해왔다. CVID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의미한다. 영문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CVID는 2003년 미국과 리비아 간 협상 때 만들어진 용어다.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 국무부 브리핑에서 처음 사용된 이후 미국의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리비아는 미국의 CVID 조건에 맞춰 한번에 핵폐기를 진행했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보상을 받는 한편 북미수교까지 맺었다. 하지만 그 이후 리비아 정권은 몰락했다.
대북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은 CVID를 패전국에게 받는 항복문서이자 일방적인 무장 해제의 의미로 받아들이며 강한 거부감을 보여왔다.
이 때문에 미국은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CVID라는 말을 피하고 대신 FFVD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FFVD란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핵폐기(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상 CVID와 말만 달라졌을 뿐 실질적인 의미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CVID라는 말에 강하게 반발하니 미국이 FFVD라는 말을 만들어내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FFVD는 6.12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새롭게 제시한 비핵화 원칙으로 알려져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취임 직후인 지난 5월 PVID(Permanent,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즉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주장했다. PVID는 사실상 CVID를 뜻한다. 하지만 PVID에 대해 북한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강한 거부감을 보이자, 폼페이오 장관이 6‧12 싱가포르 센토사 북미정상 합의문에서 PVID 내지 CVID를 완전히 빼고 새로운 용어를 제시한 것이다.
당시 일각에선 "미국이 그동안 강력하게 주장해 온 CVID가 센토사 합의에서 빠진 것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북한의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사진=노동신문] |
◆ '미국의 대외 전략통' 펜스 부통령, FFVD→CVID 바꾼 배경은 뭘까
최근 미국은 다시 CVID라는 용어로 회귀하고 있다. 펜스 부통령이 이날 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FFVD가 이닌 CVID를 꺼내든 것이 대표적이다.
이와 관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한반도비핵화대책특위 창립회의 기조강연에서 "미국 관료들이 다시 이달부터 CVID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면서 "미국 실무관료들에 의해 북한의 선(善)행동을 요구하던 지난 25년의 인습으로 복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리비아 비핵화 협상을 이끈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리비아 방식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있다"며 "미국이 리비아 방식을 고수할 경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약속을 이행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고 밝혔다.
정 전 장관은 또 "이 때문에 북미협상이 중간지점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미래핵 동결 수준에서 봉합된다면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은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북 전문가는 "이번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한 아세안 국가 정상들은 대부분 우리 정부의 스탠스에 맞춰 FFVD라는 용어를 썼지만, 오직 펜스 부통령만이 CVID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고 말했다.
이 전문가는 그러면서 "펜스 부통령의 CVID 언급은 그냥 즉석에서 생각난 대로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치 전문가인 펜스 부통령이 CVID와 FFVD를 구분 못했을 리 없다"면서 "사전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문 대통령에게도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외교가의 한 고위인사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서두를 것 없다고 언급한 대목을 유의해서 봐야 한다"며 "북한이 확실한 비핵화 조건을 총족시키지 않으면 대북제재를 풀지 않고 계속 가면 된다는 의미인데, 같은 맥락에서 펜스 부통령이 CVID를 언급한 것 자체가 비핵화 진전 없이는 북한에 대한 압박을 전혀 풀지 않겠다는 강수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김학선 기자 = 15일 국회에서 열린 한반도비핵화대책특별위원회 창립회의에서 심재권 위원장과 기조강연을 맡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오른쪽에서 두번째), 위원들이 회의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8.11.15 yooksa@newspim.com |
◆ 美, 유연한 北 비핵화 FFVD 전략 버렸나...전문가 "CVID, 대북 압박전술 높이는 차원"
이달초 미 국무부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북한 측 카운터파트인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과의 만남을 앞두고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 1일 미 국무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언론 브리핑 자료에 따르면 로버트 팔라디노 국무부 부대변인은 "우리의 목표는 그대로다. 북한의 FFVD"라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좋은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앞서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달 8일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원, 왕이(王毅)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등을 만나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달성에 대한 공동의 결의를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5일에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미국에 ‘비핵화 협상 진전을 위해 북한에 대한 핵무기 신고와 검증 요구를 미뤄달라’고 제안하자, 당시 미국 국무부는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 즉 FFVD(Finally,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가 미국의 목표"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는 대변인 논평을 통해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FFVD에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미 행정부 고위인사들의 일련의 언급은 미국의 비핵화 전략이 6.12 북미정상회담 이후 줄곧 FFVD였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이에 따라 펜스 부통령의 CVID 발언은 단순한 선언적 의미 이상이라는 것이 외교 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이에 대해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펜스 부통령의 언급을 확대 해석해서 대응하기에는 다소 이르다"면서 "아직 미 국무부의 명확한 입장 변화가 공식화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펜스 부통령이 CVID라고 말한 것을 예사롭게 보지는 않는다. (미국) 최고위층의 발언은 모두 치밀한 전략이 담겨있다. 실수가 아닐 것"이라면서 "북한에 대한 비핵화 요구 조건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대북제재 또한 조기에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못박은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