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피해자 구제 먼저 호소 vs 반올림, 사실상 사업장 직접 감시 요구
[뉴스핌=서영준 기자] 삼성전자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대화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전격적으로 사과하면서 7년여 동안 제자리 걸음이던 반도체 사업장의 직업병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니 쟁점만 늘어간다.
특히 양측의 대화는 당초 목적은 어디로 가고 자꾸만 변질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 구제라는 명분에 우선해서 대화를 진행하자는 삼성전자. 사실상 사업장을 직접 감시하겠다며 명분과는 동떨어진 주장으로 삼성전자를 압박하는 반올림. 어렵게 시작된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까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고통받는 피해자를 생각하면 보상 합의가 우선되야 하지 않을까.
◆삼성전자, 첫 공식 사과 = 지난 5월 14일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에 대해 말씀드립니다'라는 발표문을 통해 백혈병 문제와 관련한 사과와 합당한 보상을 약속했다.
권 부회장은 이날 브리핑 전후 머리를 숙여 사과의 뜻을 충분히 밝히면서 반올림과 심상정 의원 측이 제안한 내용을 전격적으로 수용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제3의 기구를 통한 보상, 재발방지대책 마련, 산재소송 보조참가 철회 등을 제안했다.
권 부회장은 "제안 수용을 계기로 이른 시일 내에 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돼 당사자와 가족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덜어지기 바란다"며 "진작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강조했다.
◆산재 소송 보조참가 철회 = 공식 사과 이후 삼성전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첫 실천으로 산재 소송 보조참가를 전격 철회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0년부터 근로복지공단의 산업재해 불승인판정에 대한 총 10건의 소송 중 4건에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해 왔었다.
하지만 반올림과의 협상을 앞두고 삼성전자는 사과 다음날인 5월 15일 법원에 보조참가 신청 취하서를 제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모든 산재 행정소송에서 손을 뗏다.
백수현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 전무는 "보조참가 철회가 장기간 쌓였던 불신의 벽을 허무는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하며 앞으로도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본격 협상 돌입…이견차 확인 = 지난해 12월 1차 본협상에 이어 5월 28일 진행된 2차회의에서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협상 기본 원칙을 마련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날 양측이 합의한 내용은 ▲사과·보상·재발방지 동시 대화 ▲회사가 제기한 고소건 해결 ▲6월 중 3차 대화 일정 확정 등의 세 가지다.
이어 진행된 3차 교섭에서는 한 단계 더 진전된 양상을 보이긴 했으나 삼성전자와 반올림의 의견 차이는 여전했다.
지난달 25일 진행된 3차 협상에서 양측은 향후 2주 간격으로 실무진 협상을 진행하기로 합의를 봤다. 하지만 고소 취하와 관련해서는 입장 차이를 나타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가 그동안 제기한 ▲본사 앞 집회·시위 피해자 가족 ▲반올림 활동가 ▲삼성일반노조 등에 대한 고소 15건 모두를 취하해 달라고 요구했다.
삼성전자는 그러나 이번 교섭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11건에 대해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4차 협상에서도 양측은 이견만 확인한 채 자리를 일어나야 했다. 장장 5시간 30분에 걸친 마라톤 협상을 진행했지만 합의점 도출은 실패한 셈이다.
반올림 측은 공식 사과 불충분을 이유로 다시 공개 사과를 요구하면서 협상 시간의 절반에 가까운 2시간 30분을 썼다. 이에 삼성전자는 이미 임원급들이 총 3차례에 걸쳐 공식 사과를 한 점을 들어 불가입장을 밝혔다.
◆협상 본질 비켜간 무리한 요구 = 삼성전자와 반올림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5차 협상을 기점으로 애초 이들이 만난 목적이 변질되고 있는 모습이 감지되고 있다.
피해자들을 우선적으로 구제하자는 삼성전자에 반해 반올림 측이 자신들이 직접 삼성전자를 감시하겠다고 요구한 것이다.
지난 30일 오후 2시부터 6시간 넘게 열린 5차 협상에서 반올림 측은 자신들이 추천한 사람들 절반 이상으로 구성된 화학물질 안전보건위원회와 외부감사단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측은 즉각 반발했다. 정부 차원에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는 사업장에 민간 감시단을 설치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회사 내 상설기구를 설치하자는 요구는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백 전무는 "이것은 사실상 회사 안에 반올림 위원회를 상시 설치하라는 요구여서 수용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힐 수 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더불어 거듭되는 반올림의 사과 요구에 태도변화의 바람을 전달했다. 그는 "사과에 대한 유가족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반올림도 전향적으로 임해서 협상에 진전이 있었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뉴스핌 Newspim] 서영준 기자 (wind090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