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굴레에 내핍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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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오상용 글로벌경제 전문기자 = 환율 압박에 굴복해 다시 금리인상에 내몰리는 이머징 국가가 등장했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BI)은 4년래 최저치로 떨어진 루피아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깜짝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루피아 약세 압력이 고조된 상황에서 들썩이는 원자재 가격은 수입물가를 경유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기 쉬우며 이는 다시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악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이머징 아시아 전반이 겪고 있는 이러한 고통은 거시정책의 적기 대응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눈물의 긴축을 강요당할 위험을 잉태한다.
외부의 불황이 미국으로 수입될 게 겁나면 연방준비제도는 이를 금리인하의 구실로 삼을 수 있지만 여전히 견고한 미국 경제와 끈적한 인플레이션이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
1. 인도네시아의 경우
BI는 전날(4월24일) 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인 7일물 역레포 금리를 6.25%로 25b 인상했다. 익일물 예치금 금리와 대출창구 금리도 같은 폭으로 높였다. 작년 10월 이후 6개월만의 긴축 재개다. 로이터의 사전 서베이에서 금리인상을 점친 이코노미스트는 35명 가운데 6명에 불과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BI가 금리를 동결할 것이라고 봤다.
예상을 벗어난 깜짝 행보는 환율 때문이다. 페리 와르지요 BI 총재는 "이번 금리 인상은 악화하는 글로벌 리스크에 맞서 루피아 환율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며 "달러 강세와 중동분쟁 등 글로벌 불확실성으로 인해 선제적 정책 대응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올 들어 달러-루피아 환율은 5% 가까이 상승했다(루피아 약세). 이달 들어서만 루피아 가치는 2% 하락해 아시아 통화들중 세번째로 부진한 흐름을 나타냈다. 지난 4월19일에는 달러-루피아 환율이 1만6260루피아까지 상승해 루피아 가치가 4년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인도네시아의 3월 소비자물가(CPI) 상승률은 전년동월비 3.05%를 기록해 BI의 인플레이션 목표 범위(1.5~3.5%)에 머물렀지만 최근 추세는 불안하다. 작년 10월을 바닥으로 고도를 높이고 있다. 식량과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약해진 루피아는 수입물가를 경유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 높이게 된다.
더구나 만성적 경상적자를 앓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해외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통화 가치 하락으로 자본유출이 심해지면 금융시장 전반이 불안정해진다. BI가 루피아 환율 안정에 목을 매는 이유다. 이달 들어 인도네시아 국채 시장을 떠난 외국계 자금은 5억8300만달러에 달했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이 루피아 가치 방어를 위해 4월24일 깜짝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사진=블룸버그] |
2. 환율의 굴레
비단 인도네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도네시아가 맞닥뜨린 상황은 연준의 금리인하 기대 후퇴로 미국 국채 금리가 치솟고 달러의 기세가 한층 강해지면서 이머징 전반이 겪고 있는 고통이다. 그래서 환율 압박에 굴복해 깜짝 금리인상을 단행한 BI의 전날 행보는 상징적이다.
물론 단발성 금리인상으로 루피아의 약세 압력이 누그러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와르지요 총재는 정책회의 후 브리핑에서 "연준 통화정책에 대한 우리의 기본 전망은 연준이 올해 12월 25bp 금리인하를 시작으로 완하 사이클에 돌입한다는 것이지만 내년까지 연준의 금리인하가 지연될 위험도 도사린다"고 말했다. 두달전만 해도 BI는 연준이 연내 금리를 75bp 인하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번에 이를 대폭 수정했다.
참고로 BI의 기본 시나리오는 연준의 9월까지 금리인하 가능성을 70% 확률로 가격에 반영하고 있는 연방기금선물시장의 시각보다 보수적이다.
BI의 예상대로 연준의 첫 금리인하가 12월로 늦춰지거나 혹은 아예 내년으로 이월되는 위험 시나리오에서는 루피아를 비롯한 이머징 통화는 약세 압력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 사이 눈물의 긴축에 내몰리는 제2, 제3의 인도네시아가 등장할 수도 있다. 결은 다소 다르지만 엔 약세 압력이 심화하고 있는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그나마 금리를 인상할 수 있는 체력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으면 고스란히 외풍에 몸을 맡겨야 한다 - 통화 가치 훼손을 계속 감내해야 한다. 경기진작을 위해 금리를 내리고픈 국가들은 멈추지 않는 환율압박에 거시정책 운용의 스텝이 더 꼬이게 된다.
달러인덱스와 미국 10년물 국채 수익률 추이 [사진=koyfin] |
3. 강제된 내핍
이는 모두 강제된 내핍이다.
환율 방어를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행위는 매크로 관점에서 수요 억제다. 금리를 손대지 못하고 통화가치 훼손을 감내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출기업은 더 많은 환차익을 거둘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내수기업과 가계가 누렸어야할 소득분을 추렴해간 것이다. 임금이 뒤를 받치지 못할 경우 실질 구매력이 줄어든 가계는 불요불급한 소비를 줄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비탄력적인 생필품의 가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유가(원자재)가 하락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스태그플레이션(인플레이션 상승 속 경기둔화)의 기운은 높아진다. 뒤이어 경기침체와 물가둔화 국면으로 넘어가는 게 교과서적 전개다. 그런 와중에도 미국이 나홀로 성장을 구가하면 달러는 펀더멘털 격차에 의해 더 강해진다.
외부 환경이 불량해지면 연준도 해외에서 유입되는 스필오버 효과를 고려한다. 유럽 재정위기 당시 그리고 2015~2016년 중국이 불황에 빠졌을 때 연준은 글로벌 거시·금융 상황을 감안해 완화정책을 유지하거나 금리인상을 늦춘 전력이 있다.
다만 당시와 가장 큰 차이는 미국의 팽창적 재정정책이다.
과도한 재정지출로 미국 경제는 분에 넘치는(잠재 성장률을 크게 웃도는)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미국이 긴축재정으로 돌아설 가능성은 극히 낮으며 정권이 바뀐다 해도 재정건전화는 공염불로 끝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과 시장 금리의 해수면을 높이고 연준의 금리인하 여지를 제한한다. 이런 전개에선 이머징의 고통, 이머징 통화의 시련이 단기간내 끝나기 어렵다.
중동 불안이 누그러지면서 브렌트 유가의 상승세도 주춤해졌지만 여전히 1년전에 비해서는 13% 높은 수준이다. [사진=koyfin] |
osy75@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