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10명 중 9명이 재판 지연 경험 있어
"모든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하는 경향"
"야근한다고 무조건 좋은 판결 내리는건 아냐"
일부 판사의 의식적 재판 지연 지적도
'재판 지연'이 어제 오늘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국민들의 피해가 더 크다. 재판 지연은 부족한 판사수에 업무 과중, 높아진 사건 난이도 등이 주요 사유로 꼽힌다. 제도적으로 보완하면 재판 지연 문제가 과연 해소될 수 있을지 뉴스핌이 3회에 걸쳐 현실과 재판 제도 및 해외 사례 등을 다뤘다.
[서울=뉴스핌] 배정원 기자 = #1. 이혼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A씨는 초등학생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다. 실질적으로 한부모 가정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재판 지연으로 2년 넘게 지원금 등 복지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2. 성범죄 피해자 B씨는 형사사건에서 유죄를 확정받은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오랫동안 기일이 잡히지 않는 등 재판이 지연되면서 극심한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다.
과거보다 높아진 사건 난이도와 부족한 판사 수로 인한 재판 지연이 국민들의 신속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며 많은 피해를 양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부 판사들이 의식적으로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다고도 지적하고 있다.
[재판 지연] 글싣는 순서
1. 워라밸 판사 탓?...法 "시대가 변한 것"
2. 해외 법관들도 업무부담 호소…'신속 재판' 방안은
3. 檢·변호사·당사자도 마찬가지..."판사 증원·관리 방법도 고민해야"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한변호사협회가 지난해 전국 변호사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9%인 592명이 재판 지연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장 접수 이후 첫 변론기일이 잡히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는 답변이 59%로 가장 많은 응답수를 차지했다. 또한 1심 선고를 받기까지 1년 이상 걸렸다는 응답은 86%를 차지했다. 선고 받기까지 2년 이상 걸렸다고 답한 비율도 6%에 달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재판 기일이 오래도록 안잡히는 경우 기일 지정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기는 하지만 판사한테 재판을 재촉한다는 인상을 심어줘 밉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서울=뉴스핌] 사진공동취재단 =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신임 법관들이 김명수 대법원장 앞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2021.10.05 photo@newspim.com |
우선 재판 지연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사건을 처리하는 판사의 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 2019년 기준 우리나라 판사 수는 2966명으로 1인당 처리하는 사건 수는 약 464건이다. 반면 독일은 89.63건, 프랑스는 196.52건, 일본은 151.79건으로 우리나라 판사 한명이 처리하는 사건 수가 독일의 5.17배, 프랑스의 2.36배, 일본의 3.05배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양태정 법무법인 광야 대표변호사는 "좋게 말하면 권리의식이 높아진 것이고, 안좋게 말하면 너무 각박해진 것일 수도 있는데 요즘 사람들은 모든 분쟁에 대해 법적 판단을 받으려고 한다"며 "그에 따라 사건의 수가 늘어나게 됐는데 이를 처리할 판사의 수는 부족한 것이 문제이다. 판사 증원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종흔 법무법인 신우 대표변호사는 "예전 판사들은 소명의식이 굉장히 강했다. 그래서 늦은 시간까지 기록을 검토하고 판결문을 썼다. 그러나 요즘 판사들은 자신들을 그저 공무원이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다. 사건 처리와 관계없이 6시면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며 재판이 지연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중시하는 문화' 등의 영향으로 일부 판사들이 의식적으로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고법 부장 승진제는 지방법원 부장판사들이 '법관의 꽃'이라 불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할 수 있는 제도로 판사들로 하여금 업무 성과를 내게 하는 유인책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과 줄세우기 인사 등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결국 지난 2020년 폐지됐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jeongwon1026@newspim.com |
박 변호사는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판사도 승진과 같은 보상이 있어야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된다"며 "승진의 한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건을 빨리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과거 고법 부장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사건처리비율, 상소비율, 법원 내 평판 등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챙겨야 했기 때문에 법원 전반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비록 승진제도는 폐지됐지만 판사에 대한 성과평가를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확실한 인센티브가 있다면 재판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고법 부장 승진제도가 있었을 때는 일주일 중 5일 야근은 기본이었고 늘 시간에 쫓겨 판결문을 썼다"며 "사실 판결문은 기록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작성해야 하는 것인데 무조건 야근을 한다고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보다 야근을 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사회분위기가 바뀌었다"며 "재판 지연을 해소하기 위해 판사가 매일 야근할 것이 아니라 인력을 증원하고 증거개시(디스커버리)제도나 대체적 분쟁해결제도(ADR)를 도입하는 등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건 난이도가 높아진 점도 재판 지연의 사유로 꼽힌다. 신속한 재판도 중요하지만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과거에 비해 사건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졌다"며 "판사들도 재판 지연에 대한 지적을 인식하고 있지만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사건이 많지가 않다. 특히 쟁점이 복잡하고 증인의 수가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재판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며 현실을 토로했다.
재판 지연은 재판부의 업무 과중과 함께 부족한 승진제도 등 구조적 문제에 워라밸 문화 확산 등이 얽혀 "시대가 변한 것"이라고 법조계는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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