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홍승훈 선임기자 = 오늘은 기관투자자들의 주식매매시스템에 대한 이야깁니다. 인공지능(AI)이 이미 우리 삷 곳곳 확산되고 있는 요즘, '구닥다리' 매매시스템에 대한 우울한 사연입니다.
국내 자산운용사의 한 펀드매니저는 2011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 컨퍼런스에 참석해 망신을 톡톡히 당합니다. 아시아의 내로라하는 매니저들이 모인 저녁자리였죠. 알고리즘 트레이딩이 화제에 올랐는데 듣다보니 한국 시스템이 너무 후진적인 걸 비로소 안거죠. 그는 출장을 다녀와 몇몇 증권사에 시스템 도입과 개선을 요청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10여년이 흐른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합니다.
알고리즘 트레이딩은 컴퓨터가 주식매매를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매매 물량이 많다보면 일일이 사람이 하기 어려워 컴퓨터가 특정한 알고리즘에 따라 매매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억, 수백억원어치 매매를 하는 기관투자자들에겐 필수템이죠.
기관들이 대량거래시 쓰는 방식은 크게 VWAP(Volume-Weighted Average Price)와 TWAP (Time-weighted Average Price) 방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TWAP은 시간 단위로 쪼개 주문을 내는 프로세스입니다. 정해진 짧은 시간 혹은 기간동안 균등하게 분할해 주문을 냅니다. 물량에 따라 1분, 5분 등의 주기로 매수 매도를 하는거죠.
이렇다보니 가격변동에 대한 예측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한 연기금이 OO전자 1만주, 50억원어치 사려고 브로커에게 주문을 내면 이 브로커는 물량을 일정 주기로 수십차례에 걸쳐 기계적으로 사들입니다. 눈썰미가 좋은 플레이어들은 호가창 등 매매패턴을 보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 이를 역이용한 매매도 합니다. 시장 호구가 되는거죠. 결국 이 연기금은 평단가를 높여 주식을 사들이게 됩니다. 주로 우리 기관투자자들이 쓰는 방식입니다.
반면 VWAP은 다소 복잡한 계산방식입니다. 다양한 매매 조건을 걸고 상황에 따라 대응을 달리합니다. 예컨대 가격이 오르면 멈추고, 낮아지면 다시 사는 거지요. 일정한 매매패턴이 아닌 불규칙 바운드로 움직입니다. 때때로 매매가 지연되는 한계는 있지만 제3자가 알고리즘을 파악하기 어려워 역이용이 쉽지 않습니다. 외국계 기관들은 대부분 이 방식을 활용합니다.
이런 알고리즘에 따른 주식거래 비용은 차이가 큽니다.<그래프 참조> 지난해 8월 자본시장연구원이 재밌는 보고서를 하나 내놨는데요. 이 '국내 기관투자자의 주식거래비용'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관투자자가 외국인의 주문집행방식으로 변경할 경우 줄일 수 있는 거래비용이 2018년 한 해만 1조원을 웃돕니다.
"거래분할 매커니즘이 얼마나 정교하냐에 따라 거래비용을 극도로 줄일 수도, 늘릴 수도 있어요. 암묵적 거래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주문집행 전략 채택과 시장인프라 구축이 시급합니다." 보고서 작성자인 이준석 선임연구위원의 전언입니다.
북미와 유럽 기관투자자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중 88%가 주식거래에 거래비용 분석을 활용하고 있고, 알고리즘매매 비중도 65% 수준입니다.
국내는 어떨까요. 국민연금급 일부 대형 기관들, 일부 거액자산가들에게만 이 같은 알고리즘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물론 일부 발빠른 기관들은 스스로 개발한 알고리즘 툴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80~90%에 달하는 공모펀드나 기금운용 기관들은 여전히 옛 방식인 TWAP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달리 뾰족한 전략도 없으면서 주문시스템만 바꾸면 수익률 1%라도 올릴 수 있는 주문방식에는 관심이 낮습니다. 요즘같은 공모펀드 쇠락기엔 더 그렇습니다. 장기투자 위주의 기관은 어차피 장기다보니 조금 높은 평단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나머지 대부분 기관들은 종목픽킹이나 시황에만 신경을 쓰지 주문전략에 대해선 정보나 인식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기관들이 증권 브로커를 선정할때 주문시스템에 대한 평가비중이 미미한 것이 그 반증입니다. 그러다보니 증권사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한국거래소나 주식브로커를 보유한 증권사들도 문제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해명합니다. 거래소는 일단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다양한 호가방식 및 매매시스템에 대한 제도와 시스템 도입도 검토중이랍니다. 다만 기관과 증권사의 적극적인 구애가 없다는 점을 관망 이유로 꼽습니다. 그래서 장기과제로 미뤄둡니다. 선진국과 달리 경쟁할만한 대체거래시스템(ATS) 없이 국내 주문체결을 독점하고 있는 거래소의 태생적 한계도 있습니다. 증권사의 경우 새로운 시스템 개발과 도입에는 인력과 비용이 수반되는데 현재 기관들 수요를 감안할 때 가성비가 맞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기관이 얼마에 사던 우린 수수료만 챙기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도 엿보입니다.
수요자는 공급자를, 공급자는 수요자를 탓하는 사이, 우리는 매번 외국인의 봉이 되고 맙니다. 여전히 외국인들에게 '글로벌 호구'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이런 주문시스템의 차이도 한 몫 합니다. 시장은 본래 공급이 수요를 창출할 때도, 수요가 공급을 견인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요즘같이 수익 1%도 아쉬운 저성장 시대에 앉아서 해마다 1조원씩 뜯겼다는 생각에 억울해 한마디 했습니다. 더구나 IT강국에다 수학천재도 많다는 우리나라에서 그렇다니 더 답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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