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뉴스핌] 김민정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장벽 건설 강행을 위해 결국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는 비난이 미국 내에서 제기된다. 9·11테러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선포되던 국가 비상사태를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층 결집을 위한 수단으로 선포했으며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는 비난이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국가 비상사태 선포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 외에도 미국의 다른 대통령들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국가 비상사태 선포로 대통령은 연방 정부 계정의 다른 예산을 재배치해 활용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가 자신이 요구한 57억 달러의 국경 장벽 건설 예산을 승인하지 않고 사용이 극히 제한된 14억 달러의 자금만 배정하자 국가 비상사태 선포로 장벽 건설을 강행하겠다는 계획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가 합의한 예산안에 서명하면서 연방정부의 셧다운(부분 업무 일시 중지)은 피해갔지만 국가 비상사태 선포로 미국 정계는 또다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로이터 뉴스핌] |
◆ “비상사태 아닌 일에 헌법 위반”
당장 정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약속한 장벽 건설을 강행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하고 있다는 비난이 거세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제로드 내들러(민주·뉴욕) 하원 법사위원장은 전날 밤 “이것은 철저한 대통령의 권력 남용”이라면서 “이것은 권력의 분립이라는 헌법의 기본적인 신조를 뒤집으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낸시 펠로시(민주·캘리포니아) 하원의장도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비상사태는 아니라면서 대응을 예고했다.
CNN의 정치 논평가인 마리아 카도나는 정치전문매체 ‘더힐’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처음으로 장벽에 대한 그의 근거가 거짓말과 그 자신 및 그의 정치 기반의 반이민 경향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이미 인정받는 사실”이라면서 “국경 상황이 정말 비상사태였다면 정부 셧다운을 지속한 35일간 이전보다 지금이 더 그러한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카도나는 “이것이 현재 비상사태라면 왜 그가 정권을 잡고 그의 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을 때는 아니었는가”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친정인 공화당에서도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가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미치 매코널(공화·켄터키) 상원 원내대표로부터 국가 비상사태 선포에 대한 지지를 담보로 예산안 서명을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평소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던 공화당 의원들조차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마르코 루비오(공화·플로리다) 상원의원은 전날 트위터에서 “어떤 위기도 헌법을 위반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 계획을 비난했다.
랜드 폴(공화·켄터키) 상원의원도 트위터를 통해 “나 역시 일부 지역의 장벽 건설을 포함해 더 강한 국경 안보를 원한다”면서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하는 방법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폴 의원은 “어떤 당이 그것을 하든 헌법을 뛰어넘는 행정 조치는 잘못됐다”고 강조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포를 지지한다. 린지 그레이엄(공화·사우스캐롤라니아) 상원의원은 지난 수일간 트럼프 대통령이 비상사태 선포를 하도록 설득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일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화제가 된 펠로시 의장의 박수 장면[사진=로이터 뉴스핌] |
◆ 비상사태 선포 흔한 일이지만 긴박한 상황에 예외적으로 사용
전문가들은 미국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가 드문 일은 아니지만 트럼프 대통령처럼 활용된 것은 흔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은 이란 인질 위기가 시작된 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서명한 1979년의 국가 비상사태를 포함해 30건이 넘는 국가 비상사태가 설정된 상태다.
프린스턴대의 킴 레인 슈펠레 교수는 “모든 종류의 일 때문에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돼 왔다”면서 “그것들은 완전히 흔한 일이라 누구도 그것에 대해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 2001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1년 후 만료됐다.
브레넌센터의 자유와 국가안보 프로그램의 공동 책임자인 엘리자베스 고테인은 USA투데이와 인터뷰에서 “9·11테러 이후 비상사태가 지속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면서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포 권한은 의회가 그렇게 할 시간이 없을 때 대통령에게 행동할 능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강조했다.
고테인 책임자는 이민이나 국경 장벽과 같은 사안에 대해 의회는 처리할 시간이 많지만 행동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즉각 대응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상원 다수 석을 공화당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포를 거둬들이기엔 역부족일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비상사태 법’에 따르면 하원과 상원은 공동 결의안을 통해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사태를 끝낼 수는 있다. 양원 중 하나라도 이 같은 결의안에 대해 표결을 실시하면 나머지 의회도 18일 안에 표결을 진행해야 한다.
뉴욕타임스(NYT)는 민주당이 상원에서 소수당이지만 6명 이상의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을 설득할 것이라는 상황을 상상할 수는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이 같은 공동 결의안이 의회를 통과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국가 비상사태는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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