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취업 1순위 증권사, 은행 대신 선택했는데 명퇴금 2배 적어
[뉴스핌=한기진 기자] “명예퇴직에도 ‘갑(甲)’이 있나 보네요….” 김기혁(52, 가명) 우리투자증권 지점장은 은행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Y대 영문과 82학번)를 만난 뒤 억울한 심정이다. “회사가 합병하는 마당에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은행에 일하는 대학 동기의 명퇴금 규모를 듣고 첫 직장은 은행이었는데 내가 잘못 선택했나 싶어 후회해요.”
그가 말한 은행에서 일하는 친구는 씨티은행 박성화(53, 가명) 지점장이다. 그도 이번에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받는 명퇴 위로금을 봤더니 적어도 서울 강북 소재 20평대 아파트 한 채 값의 차이가 났다. 퇴직금까지 더하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증권사는 기본급이 적고 성과급이 많은 구조지만, 은행은 정반대이기 때문에 퇴직금 산정 기준이 높다.
김기혁 지점장은 ‘2년 치 연봉+생활안정자금(3000여만원)’으로 2억5000여만원을 받았다. 박성화 지점장은 ‘5년 치 연봉’인 5억여원을 받았다. 또 퇴사 후에도 큰아들의 대학등록금을 지원받는다. 김 지점장은 “자식 학자금까지 지원받는 게 가장으로서 너무 부러워요. 친구는 명퇴금으로 상가에 투자한다고 하네요. 전 당장 생활유지가 걱정인데”라고 했다.
김 지점장의 푸념에도, 그는 금융투자업계에서는 행운아다. 명퇴금 규모가 업계 최고 수준이다. 한화투자증권은 희망퇴직금으로 올 초 1년 치 연봉만 줬다. 한 직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는 것도 행운이다. 10대 증권사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9.4년에 불과하다. 우투증권은 10.7년으로 현대증권 1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김 지점장은 “명퇴를 거부하고 몇 년 더 일하면 임금피크제로 들어가 1억6000만원은 더 받을 수 있다”고 했다.
◆ “대학 졸업때는 최고의 직장이었는데….”
대학 졸업 당시 두 사람의 실력이 차이가 나서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게 아니다.
두 사람이 졸업한 1989년은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돌파하며 증권가가 환호성을 질렀다. 1986년부터 1989년 사이 많은 기업이 신규 공모와 유상증자로 주식시장에서 엄청난 금액을 조달했다. 투자자들은 공모주든 유상증자든 주식이면 무조건 사들였고 증시는 활황을 구가했다. 1989년 한 해에만 기업공개로 3조510억원, 유상증자로 11조1245억원 등 기업들이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당연히 증권사는 대학졸업자의 취업희망 1순위였다. 김 지점장은 “최고의 직장이었고 연봉도 무척 좋았다. 2주마다 월급을 받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반면 박 지점장은 “원래 전공을 살려 무역금융을 하기 위해 은행에 들어왔는데, 당시에 선배들이 은행은 ‘사양산업’이라고 했다”고 했다.
◆ 엇갈린 업종 발전 수준... 명퇴금 규모도 달라한국씨티은행은 명예퇴직 직원들에게 60개월치 연봉을 위로금으로 주기로 했다.
두 사람의 처지가 뒤바뀐 것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뒷걸음치면서 자본시장은 위축된 반면, 은행업은 성장한 구조 때문이다.
‘꿈’을 먹고 사는 자본시장은 기업들이 채권이나 투자 수요가 줄었고 자연스레 개인들도 투자 매력을 잃었다. 코스피 하루 거래대금이 10조원에서 지금은 3조~4조원대로 급감한 게 이를 반영한다.
반대로 은행업은 축적된 자본을 안고 규모를 키웠고 꾸준한 가계와 기업대출로 안정적인 수익을 쌓아갔다.
이런 과정에서 사측이 희망퇴직에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의 수준이 달라졌다. 증권사의 명퇴금은 내부 유보 현금에서 나온다. 반면 씨티은행은 명퇴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최소 3000억원 상당의 서울 중구 다동 소재 본점을 매각한다.
신한은행 한 부행장은 “전국 주요 도시의 중심가에는 반드시 은행 지점이 설치되는데 보통 입점한 건물도 사들이고 이런 일이 수십 년간 있었으니 은행 자산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반면 증권가는 자본시장 위축으로 보유 자산을 대부분 팔았다.
노동조합의 힘도 작용했다. 은행이 속한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조합원 수가 17만명에 달할 정도로 ‘힘’이 막강하다. 단체행동에 나설 경우 은행 경영진도 무시하기 어렵다. 반면 증권 노조는 한국투자증권 등 4개 증권사가 소속된 전국사무금융서비스조합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등에 불과하다.
[뉴스핌 Newspim] 한기진 기자 (hkj7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