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적금 유치는 기본…카드·보험까지 팔아야
[뉴스핌=노종빈 기자] "실적 스트레스요? 물론 장난 아니죠!"
22일 명동의 한 시중은행 창구에서 만난 은행 창구직원 박소현(가명)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밝게 웃었다.
◆ "실적 스트레스? 장난 아니죠!"
흔히 제1 금융권이라 불리는 시중은행은 연봉이 높고 복리후생이 잘 돼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은행은 비교적 경기와 무관하게 고용상황도 안정적으로 인식되며 금융업종 가운데 구직자들의 취업 선호도가 가장 높은 직종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은행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항상 '실적 스트레스' 때문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20대 후반의 박씨는 모든 구직자들이 부러워하는 이른바 '꿈의 직장'이라는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 입사한 지는 만 1년 조금 더 지났고 조직에도 나름 열심히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처음에는 금융상품 판매 실적 압박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실제로 경험하니 후덜덜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카드 가입을 비롯해 펀드나 방카슈랑스 등의 판매 캠페인이 내려오는 경우가 많고, 특히 이들 금융상품 판매실적과 관련해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다들 쉽게 신청서를 써줄 줄 알았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달콤한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생각보다 실적은 오르지 않고 내가 은행이라는 곳에 맞는 건가? 카드사 영업직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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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직원들 "행복은 실적 순"
그러자 박씨보다 연차가 높은 직원인 김민영(가명)씨는 "카드만 하면 다행일 것"이라며 "사실은 예금과 대출, 방카(보험상품)도 다 팔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면 이에 대한 판매 캠페인이 벌어지고 이를 달성하지 못한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인사고과에 반영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므로 여러가지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은행직원들 사이에서는 '행복은 실적 순'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있을 정도다.
그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실적 압박이 더욱 세지며, 사실상 캠페인의 연속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면서 "실적을 잘 쌓으면 승진도 빠르지만 못하면 결국 후선으로 발령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농협에 다니는 경우는 농협 상품권이 있어서 실적 압박이 더욱 심하다"며 "거기에다 출자금 실적(단위농협의 주권을 파는 것)까지 채워야 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은행과 거래하는 한 중소기업의 경리부 직원 한준호(가명)씨는 은행에 들어가기가 겁난다고 한다. 은행에 갈 때마다 은행 직원이 대봉투에 두둑히 담아서 주는 카드신청서 때문이다.
그는 "거래업체 직원도 카드사 모집인이 된 듯하다"며 "회사에 돌아와 직원들에게 가입 요청을 하면 카드사에서 알바하냐, 수당받고 있냐고 물어본다"고 하소연했다.
◆ 연장근무 상시화…월 62.8시간 초과근로
이와 함께 은행 직원들은 대부분 하루 2~3시간 정도의 연장 근무는 당연한 듯 인식돼 있다.
최근 금융산업노동조합 측이 제시한 한 조사에 따르면 금융권 종사자들은 월 62.8시간에 이르는 초과근로 등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2000년대 초 금융권 구조조정후 최소 인력만을 유지하고 점포당 인원을 감소하는 추세도 업무시간 증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영업시간을 단축한다고 해서 노동시간이나 초과근로 문제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어 문제다.
금융권 관계자는 "실적을 잘 내기 위해서 사무적 일을 저녁에 모두 미뤄둬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금융직종 종사자들은 가정이 아닌 직장이 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이로 인해 여가생활이 거의 없거나 가정이 소외되는 결과를 낳고 있으며, 이 때문에 금융권 종사자들의 삶의 질도 저하되는 모습이다.
무엇보다 노동시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성숙되지 않고 있으며 규제의 사각지대를 낳고 있는 것도 큰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 8시간, 주 40시간 노동이 법적 사회적으로 당연시 되는 규범으로 정착돼야 한다"면서 "회사는 개개인에 삶의 질과 함께 건강한 노동 기회를 제공하고 직원들은 품질과 능률이 뒷받침된 스마트 워킹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 당국 '정량적 평가' 한계 노출
최근 금융 당국도 금융권 실적 평가의 폐해를 비롯한 직원들의 근태 및 복리후생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현재의 감독 방향은 정성적 측면보다는 정량적 측면에 기울고 있기 때문에 이렇다 할 행정지도 등 개선 조치를 취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관련법규의 위반이 드러나지 않는 한 가시적인 조치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경영진이 달성 불가능한 정도의 과도한 목표를 내리거나 직원의 건강이나 생명권에 직결된 문제, 사고의 개연성을 유발하는 상황이라면 경영관리의 적정성 관점에서 지적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본연의 업무인 금융 건전성 및 시스템 안정성 감시업무 외에 별도의 금융 종사자나 시장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감독 상의) 원칙은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결국 이 문제는 금융권 내부의 성찰이 필요하며, 특히 개별 금융사의 노사 및 복리후생 등 경영관리 측면에서 먼저 접근해야 할 것으로 관측된다.
한 금융권 전문가는 "국내 금융권 종사자들은 지나치게 야근이나 잔업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그렇게 되면 결국 개인도 불행해지고 시간이 지나면 어떠한 조직도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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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 Newspim] 노종빈 기자 (unti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