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중국과 일본 관계가 1971년 중일 수교 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사태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자위권' 운운 발언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과거사 반성은 커녕 신사참배로 오히려 상처를 헤집고, 심지어 '하나의 중국'이라는 수교 원칙 까지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본의 도발을 좌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중국 사회 일각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고 2차피해를 가하는 격이라며 일본의 무도함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서도 한치 양보를 하지 않았던 중국이 일본에 대해서는 한발 더 나가 마치 '단교 상황'까지 각오 한듯 한층 강력한 대응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중국 네티즌은 SNS에서 최근 상황을 보면 과거 서방국들이 상하이 조계에 설치했던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생각난다며 분노를 표시했다.
11월 17일 중국 산둥성 칭다오 현지에서 만난 중국 지인은 일본 단체 관광단 여행 프로그램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고 귀뜸했다. 더욱이 여행사들이 자발적으로 여행 예약을 전액 환불 형태로 해지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중국 정부 입장은 매우 단호하다며 중국의 보복 제재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고 중일간 이번 충돌은 일본의 정치 지형을 바꾸는 상황으로 까지 비화할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중 관세전쟁 처럼 치킨 게임 양상을 보이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대 충돌은 일제 침략자에 대한 고발과 응징을 주제로 한 오래된 중국 영화 '정무문'을 떠올리게 한다. '정무문'은 내면에 감춰진 중국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영화다.
정무문 영화를 보면 중국 공산당의 핵심이익 '대만' 문제를 넘어 최근 같은 상황에서 중국이 왜 일본이라고 하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정무문은 단순한 무술 영화가 아니라 민족 혼과 국가 공동체 집단 의식을 일깨우는 반일 체제 계몽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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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청나라)은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아편전쟁(1839년~1841년)에 패배한 후 난징조약(1842년)에 따라 홍콩을 영국에 내주고 상하이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서구열강에 강제로 개항한다. 1972년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精武門)'은 난징조약의 산물인 상하이 조계 상황을 통해 패전의 결과가 중국인들에게 어떤 치욕을 안겨줬는지를 일깨워주는 영화다.
영화 정무문에서 일본인 홍구무도장(倒起流 일본유도) 사람들은 희희덕거리며 정무문 도장에 '동아병부(東亞病夫, 아시아의 병자)'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를 내팽개 치고 간다. '동아병부'는 수십년간 열강의 눈에 비쳐진 중국인들의 한심하고 무기력한 모습이고, 그런 중국에 대한 서방 사회의 조롱이다.
일본과 서구 열강은 아편에 쩔어 신체가 쪼그라들고 정신이 쇄약해진 중국인들을 일컬어 '아편귀신'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1896년 한 영국인은 상하이에서 펴낸 영문잡지에서 이런 중국인을 '동아의 병자(Sick man of East Asia)' 라고 표현했고, 나중에 이는 청말 사상가 양계초에 의해 '동아병부'로 번역돼 중국사회에 알려졌다. 무술 영화 정무문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상징하는 바로 이 동아병부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나폴레옹은 1800년대 초 '중국은 잠자는 사자다. 사자가 잠에서 깨어나면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다' 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는 그때 부터 약 두 세기 뒤의 중국에 대한 예언이라면 몰라도 아편전쟁 이후 중국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얘기였다. 당시 중국은 말기 암환자나 다를 바 없었다. 찔러도 비명조차 못 지르고 최후를 맞는 늙고 병든 이빨 빠진 사자나 마찬가지였다.
수천년 문화 중심국으로 자부해본 중국은 아편전쟁 때 부터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의 신중국이 건립되기 직전 까지 100년이 훨씬 넘게 일본과 서방에 의해 유린당하며 형언할 수 없는 치욕과 수모를 당했다. 한국의 손기정 선수가 참가해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했던 1936년 베를린 올핌픽때 중국은 69명의 선수를 내보냈는데 메달을 하나도 따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서방 신문은 어깨가 축 쳐져 돌아가는 중국 선수단에 대해 만평으로 '동아병부'라고 풍자했다.
열강의 할거 속에 중국이라는 나라가 '아시아의 병자'였다면 상하이 조계사회에서 중국인의 신분은 '개만도 못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정무문에서 조계의 한 건물 문지기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주인공 '천전(陳眞)'을 제지한다. 문지기는 천진을 향해 출입문 옆에 설치된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狗与华人不得入内)'라 푯말을 가르키며 앞을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면박을 준다.
문지기의 이 말은 중국인은 개와 같은 '신분'으로 자기 나라 땅에 있는 이 건물에 조차 마음대로 발을 들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천진이 진입을 제지 당한 채 난처해하던 그순간 강아지 한 마리가 서양인 주인을 따라 보란 듯이 출입문안으로 들어간다. 주인공 천전은 중국인이 제나라 땅안에서 개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한다.
정무문의 시대적 배경인 상해 조계는 철저한 치외법권지대였고 외국인들이 주인인 이곳에서 중국인들은 식민국 피지배층과 같았다. 영화에서 정무문은 정의의 도장으로서 그런 불의에 대항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임을 말해준다. 정무문 사람들은 주인공 천전의 과단성있는 행동과 '이에는 이' 식의 철저한 설욕, 보복 응징만이 무도한 일본에 맞서는 옳바른 방식이라는데 뜻을 모은다.
'정무문' 도장은 빛나는 중국 무술 혼으로 단호하게 침략자들을 응징한다. 영화 정무문에서 일본의 조롱과 만행에 대한 주인공 천전의 복수는 사람의 혼을 빼는 미종권과 쌍절곤을 통해 절정에 이른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또다시 과거사를 왜곡하고 공공연히 도발을 일삼는 일본이라는 '불의'와 맞딱뜨렸다. 태평양 전쟁 때 처럼 전쟁의 기운이 스멀대는 요즘, 중국 지도부는 14억 중국인들에게 다시 '정무문 정신' 을 일깨우고 있는 것 같다.
서울= 최헌규 중국전문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chk@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