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압박에 은행 간 대출 나눠주기, 기현상
당국이 자율이라지만 배분·세부 지침까지 정해
[서울=뉴스핌] 최유리 기자 = 신한은행이 NH농협은행의 아파트 잔금대출을 대신 내주기로 했다. 금융당국의 총량 규제에 따라 농협은행의 대출 여력이 바닥나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신한은행이 지원에 나선 것이다. 가계대출 규제로 실수요자 중심의 잔금대출이 막히자 금융당국에서 은행 간 대출 품앗이를 유도한 결과다.
[서울=뉴스핌] 최유리 기자 = 2021.07.15 yrchoi@newspim.com |
농협은행 외에 다른 은행들의 잔금대출 수요도 신한은행이 넘겨받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월 말 기준 신한은행의 가계대출 증가율은 4.4%로 시중은행에서 가장 낮다. 상대적으로 대출 여력이 있다는 얘기다. 올 연말까지 잔금대출이 필요한 사업장은 110여개로 규모는 6조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신한은행이 백기사로 나설 수 있었던 건 연초부터 타이트하게 관리한 덕이다. 지난 2020년 말 가계 신용대출을 일시중단했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진옥동 신한은행장의 지시로 전사적 차원에서 가계대출을 관리했다.
주요 부서 팀장급 회의체를 구성해 대출 증가율에 대한 예측 정확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금리를 깎아 외형을 확장하는 것은 지양하고 상대적으로 거액이 취급되는 직원의 신용대출 한도를 줄여 실수요자 공급을 늘렸다.
정부 규제로 은행권 대출 중단 조치가 확산될 때 신한은행만 유독 조용했던 배경이다. 금융당국도 신한은행 사례를 들어 벤치마킹할 것을 주문했을 정도다.
선제적 조치로 타행 잔금대출이 중단되는 일을 막았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관리의 의미가 무색해졌다. 결국에는 당국이 나서 가계대출을 기계적으로 배분한 꼴이 됐기 때문이다.
신한은행 입장에서도 등 떠밀리듯 대출 여력을 타행 뒷수습에 썼다. 잔금대출은 비교적 규모가 크지만 주거래 고객으로 전환하기로 어려운 수요로 실익이 크지 않다. 연말까지 대출 풍선효과에 대비해 한도를 남겨둘 필요도 있다. 그럼에도 실수요자 대출 중단을 막아야 한다는 당국의 주문을 거절하긴 어려웠을 거다.
KB국민은행도 자체적인 관리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이 은행은 실수요자 대출은 내주되, 필요 이상의 대출을 막기 위해 전세대출 한도를 보증금 증액 범위로 제한하는 등 전세대출과 잔금대출 관련 조치를 내놨다. 실수요자에게 필요한 만큼만 대출을 공급할 수 있어 모범사례로 거론됐고 전 은행권으로 확산됐다. 당국 압박에 마른 수건 짜듯 내놓은 대책이 이정표처럼 세워지자 달갑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내년에 더 강도 높은 대출 규제를 앞두고 은행들은 벌써부터 고민이 깊다. 대출자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강화와는 별개로 가계대출 증가율을 올해보다 낮은 4%대로 조여야 한다. 연간 총량뿐 아니라 분기별 관리도 해야 한다.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올 하반기 은행권을 흔든 대출대란 사태를 매월 겪어야 할 수도 있다. 겉으로는 은행 자율에 맡겼다지만 뼈 속까지 관치가 파고든 상황이 내년에도 되풀이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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