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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파워리더] 포드의 구세주 멀랄리, 어디로?

기사입력 : 2014년06월03일 09:52

최종수정 : 2014년06월19일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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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포드 회생시킨 '외부인'…향후 거취 관심

[뉴스핌=주명호 기자] 앨런 멀랄리 포드 CEO의 향후 거취는 과연 어떻게 될까? 2006년부터 포드를 지휘해온 멀랄리는 올해 7월 1일자로 CEO직을 내려 놓는다.

그가 그대로 은퇴할 지, 아니면 또 다른 기업을 맡을지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 하지만 자동차업계의 외부인임에도 침몰하고 있던 포드를 맡아 성공적으로 회생시킨 멀랄리의 업적은 경영난을 겪고 있는 다른 기업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난해 스티브 발머의 뒤를 이를 차기 마이크로소프트(MS) CEO 후보 논의가 한창일 때, 멀랄리는 당당히 유력 후보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최근에는 미국 유통업체 타깃의 차기 CEO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분야에 상관 없이 그의 경영 능력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 앨런 멀랄리는 누구?

멀랄리의 꿈은 애초에 우주 항공 분야와 맞닿아 있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달 최초 착륙 계획이 청소년기 그의 직업적 동기부여에 크게 일조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어머니의 모교였던 캔자스대학교에서 항공 및 우주공학 학사와 석사 과정을 연달아 마친다. 그의 최종학력으로 알려진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는 이보다 한참 뒤인 1982년에 받게 된다.

멀랄리가 항공기 제조업체 보잉을 첫 직장으로 선택한 데에도 이런 배경이 있다. 1969년 엔지니어로 '보잉맨'이 된 그는 승진을 거듭한 끝에 1994년 보잉 항공개발부 수석부사장에 취임해 항공 개발 활동의 전권을 위임받게 된다. 1997년에는 보잉사 부사장 자리에 올랐으며 2001년에는 보잉 상용기 부문의 CEO 자리를 맡는다.

2006년 9월 멀랄리가 포드 자동차의 새 CEO로 임명됐을 때 업계에선 반신반의했다. 당시 포드는 경영 부진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멀랄리는 자동차업계와는 무관한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취임 후 그의 첫 행보는 적자 브랜드를 과감히 정리하는 일이었다. 2007년 애스턴 마틴을 프로드라이브에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2008년에는 랜드로버와 재규어를 인도 자동차회사 타타그룹에 넘겼다. 2010년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고급 브랜드 볼보를 중국 지리(吉利)자동차에 팔아치웠다. 이 외에 현금 확보를 위해 일본 마쓰다의 지분도 다량 매각했다.

멀랄리는 포드의 정상화를 위해 또 다른 방안을 내놓는다. 회사 로고를 비롯한 미국 내 모든 자산을 담보로 채권단으로부터 235억달러를 빌린 것이다. 이를 통해 포드는 핵심 사업에 주력할 수 있는 현금을 마련하면서 미국 3대 자동차기업(포드, GM, 크라이슬러) 중 유일하게 구제 금융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회생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멀랄리의 지휘로 포드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된다. 2013년 포드의 순익은 직전년보다 26%나 증가한 72억달러를 기록했으며 시간제 근로자를 포함한 전직원에게 8800달러씩 성과급을 지급했다.

멀랄리도 보상을 받았다. 주식을 제외한 2013년 멀랄리의 총 연봉(성과급 포함)은 2250만달러(약 229억5675만원)로 전년보다 11.2%나 올랐으며, 주식 수익률도 22.3%를 기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멀랄리는 지난해 미국 기업인 연봉 순위 19위를 차지했다.   

앨런 멀랄리 포드 CEO. [사진 : XINHUA/뉴시스]

◆ 포드는 어떤 기업

포드는 자동차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1903년 설립한 포드는 '포디즘'으로 알려진 대량 생산 체제를 통해 자동차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1919년 법인으로 등록한 포드는 1920년대 중반 미국 자동차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세를 넓혔으나, 이후 GM에 밀리면서 2위 자동차 기업으로 내려앉았다.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포드는 극심한 경영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5년까지 줄곧 적자를 모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결국 포드는 보잉에 재직 중이던 멀랄리를 CEO로 앉히고 적극적인 회생에 나선다.

2009년 결국 다시 흑자로 전환하면서 미국 자동차 업계 빅3 중 가장 먼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한때 채권자들에게 담보로 맡겼던 포드의 파란색 타원 로고도 2012년 신용평가사 무디스와 피치의 투자등급 상향으로 7년만에 돌려 받게 된다.

멀랄리의 뒤를 이을 차기 CEO는 마크 필즈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맡을 예정이다. 25년간 포드에 근무한 명실상부한 포드맨인 그는 2012년 말부터 COO를 맡아왔다.

필즈는 북마사업부문을 흑자로 돌려 세우는 등 뛰어난 경영 능력을 인정 받아 일찌감치 차기 CEO로 꼽혀 온 인물이다. 멀랄리는 "(필즈에게) 더 가르쳐 줄 게 없다"며 그의 능력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기도 했다.


[뉴스핌 Newspim] 주명호 기자 (joomh@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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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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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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