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손님으로 들락거리던 청년 사업가
죽·영양제 챙겨주며 "한국 가서 살자"
한밤 숙소에서 탈북한 뒤 동남아 체류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며 영화배우 꿈꿔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서울에서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는 탈북민 김서아(30) 씨는 한때 캄보디아 한인사회에까지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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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필라테스 강사 김서아 씨는 평양 출신으로 캄보디아의 북한 식당에서 일했다. 단골손님으로 드나들던 한국 청년 사업가와 불같은 사랑을 불태우다 2018년 탈북했고 2년 뒤 한국에 정착했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0.08 yjlee@newspim.com |
평양 출신으로 현지 북한 식당에 파견돼 일하던 그녀를 두고 '연예인 누구누구와 닮았다더라'는 식의 입소문이 번졌다. 인근 국가의 북한식당에서 일하는 북한 종업원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그런 서아 씨를 짝사랑하며 홀로 열정을 불태우는 한 한국 청년사업가가 나타났다. 처음엔 단골손님으로 자주 들락거리며 엄청난 '매출'을 올려주더니 급기야 위험을 무릅쓴 행동에 나섰다.
이 한국 청년은 식당일에 지쳐있던 서아 씨를 위해 캄보디아 의사를 불러 몰래 영양제를 맞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죽을 쑤어 말없이 내밀며 곁을 지켰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는 말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북한 식당 안팎으로 알려졌다. "한국으로 가서 같이 살자"는 청년의 위험한 제안에 서아 씨의 감정 또한 거침이 없는 단계로 치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두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뛰어 건너기로 했다.
◆첩보영화 같은 숨막히는 탈북..."비용 수 억원 썼다"
2018년 늦가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캄보디아 번화가의 3층 건물 숙소에서 탈출한 서아 씨는 다친 다리를 끌고 한국 청년이 준비한 차에 올랐다. 다친 다리와 찢어진 몸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현실로 펼쳐졌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제3국을 거쳐 남한에 오기까지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무작정 해외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숱한 곡절과 좌절을 겪었다. 한국 입국이 쉽지 않아 동남아의 한 국가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혼으로 이어지면 두 사람의 운명 같은 사랑은 결실을 맺었지만 탈출을 위한 비용과 해외 생활에 수억 원의 돈은 족히 들었을 것이라고 수아 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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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캄보디아 북한 식당에서 일하다 2018년 탈북한 필라테스 강사 김서아 씨. 김 씨는 자신의 탈출과 국내 정착을 도운 한국 청년 사업가와 결혼해 살고 있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0.08 yjlee@newspim.com |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2020년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다. 국내 정착의 첫 보금자리는 남편의 고향인 대구였다.
"정착 초기에는 한껏 들떠 있었어요. 북한에서도 악바리처럼 살았는데, 남한에서도 열심히 살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보다 더 많은 소를 몰고 고향(북강원도 통천)에 가서 '나, 성공했습니다!'라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스물다섯 청춘의 패기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의지를 단번에 꺾었다. 당시 대구에는 시아버지만 홀로 계셨는데, 부부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신 것이다. 남한에 오면 시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착한 며느리로 살고 싶었지만, 결국 가족도 친척도 없는 외로운 남한살이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다시 해외로 나갔다가 코로나19 장기화로 1년 넘게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홀로 아들을 키워야 했던 서아 씨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바리스타와 제빵 자격증에 도전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아들을 업고 수업에 참석해야 할 때도 있었다. 새벽에 열리는 운전면허 학원까지 다니며 일·공부·육아를 병행했다.
◆"'탈북민 강사' 드러날까 가슴 졸이기도 했죠."
"처음에는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배우다가, 결국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 자격증을 따고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북한에서 무용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필라테스 자격증에 도전했고, 마침내 강사로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필라테스 강사가 된 서아 씨의 가장 큰 고민은 말투였다. 회원들에게 동작을 설명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일상이었기에 자연스러운 언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인근 스피치 학원에 등록해 열심히 말투를 고치려 했지만,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솔직히 운동을 가르치는 건 힘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회원들이 제 말투를 듣고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죠. 혹시 누군가 탈북민 강사라고 문제 삼으면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늘 있었습니다."
다행히 서아 씨가 두려워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면서 그는 감사와 살아있음을 깊이 느꼈다. 회원들과 나누는 소소한 인사, 그리고 자신을 "선생님"이라 불러주는 호칭이 그녀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은 심리적 치유가 되었고, 동시에 남한 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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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캄보디아 북한식당에서 일하다 2018년 탈북한 김서아 씨는 구독자 16만명을 헤아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김서아TV] 2025.10.08 yjlee@newspim.com |
수도권에 살면 일자리도 많고 탈북민으로서 할 수 있는 기회도 더 넓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삿짐을 정리하자마자 그는 집 근처 필라테스 센터에 강사로 취직했다. 하지만 새 보금자리인 아파트의 월세는 한 달 130만원. 여기에 관리비와 생활비까지 감당해야 했다.
"북한에서는 국가가 발급한 입사증만 있으면 집에서 살 수 있었어요. 그래서 '월세'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죠. 속된 말로 집도 없는 꽃제비(북한의 부랑아)가 된 것 같아 너무 슬펐습니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회 문화를 익히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여기서는 월세로 시작해도 열심히 살면 전세나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구독자 16만명 헤아리는 유튜브 운영
희망은 꿈꾼다고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필라테스 강사, 탈북민 안보강연 등으로 분주히 살았고 16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로도 활동 중이다.
"한 번쯤 쉬고 싶었어요. 쉬지 않고 일하는데 눈에 띄게 남는 것도 없고, 달마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시부모님이 부자여서 도움을 받으면 이렇게 숨막히게 살지 않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도 해보고 아직 인천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남편에게 투정도 부리고 그랬던 것 같아요"
서아 씨를 다시 일어서게 한 힘은 가족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들이 큰 힘이 되었고, 목숨을 걸고 자신을 대한민국까지 데려온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컸다. 남편은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하다 아내의 탈출을 돕는 과정에서 사업 자금을 모두 캄보디아 경찰에 압수당했다. 평생 모은 자금을 잃으면서도 아내를 구한 것이다.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결국은 가족을 위한 건데,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걱정하며 가족을 힘들게 했을까 싶었죠. 캄보디아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사람 이라면 모든 걸 맡길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살았다면, 지금은 제가 남편과 가족을 책임지며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꾸니 오히려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서아 씨는 평양에서 살 때 공부를 간절히 원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18살에 돈을 벌기 위해 해외 식당 파견을 선택해야 했다. 남한 정착 초기에도 대학 진학을 꿈꿨 지만, 육아와 생계를 위해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경기대학교 연극 영화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내년에 개봉할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는데, 촬영 현장에서 만난 무명 배우들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연기에 진심인 배우들의 삶을 보며 자신 또한 그들처럼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거창하지 않다. 아들 생일에 원하는 선물을 사줄 수 있는 삶, 남 편과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함께 걷는 저녁,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고향 부모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소박하지만 값진 내일이다.
서아 씨는 "커가는 아이를 보면서 탈북이라는 저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며 "북한으로 돌아가 살았다면 제 아이에게도 끔찍한 삶이 이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면 저에게 한국행을 택할 수 있게 해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