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판문점 방문 때 북측지역 무성한 풀
"서로 의식 말며 살자" 김여정 발언 따르나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판문점을 방문한 지난 29일 북측 지역엔 인적이 없었습니다. 미국 측 고위인사가 찾을 땐 경비인력을 늘리고 카메라를 들고 나와 연신 찍어대던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랐죠.
해리스 부통령은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과 북측 판문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MDL)에 섰습니다. 그의 옆에 전투복 차림으로 함께 한 사람은 폴 러캐머라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입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지난 29일 판문점을 방문해 북측 판문각을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은 폴 러캐머라 한미연합사령관. 두 사람 뒷편으로 보이는 나트막한 콘크리트 경계석이 군사분계선(MDL)이고 그 너머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22.10.03 yjlee@newspim.com |
이곳은 한미 관계자들 사이에선 T2라고 불리는 군사정전위 회의실과 T3로 불리는 일직장교 회의실 사이 폭 4m의 공간입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이 건물들은 MDL선상에 걸쳐 지어졌는데, T는 'Temporary'(임시의)를 의미하죠.
가건물 형태로 지어져 곧 사라질 줄 알았는데 내년이면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을 맞는다니 아이로니합니다.
이곳은 2018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을 위해 첫 대면한 현장이고, 이듬해 6월에는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이 만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해리스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선채 김정은 체제를 향해 "잔혹한(brutal) 독재정권"이라 일갈했습니다. 핵 위협과 인권 침해 등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미 바이든 행정부의 시각이 드러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6월 30일 오후 판문점에서 만나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말끔하게 정리된 북측 지역 모습과 판문각 건물이 보인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그런데 정작 제 눈길을 사로잡은 건 해리스도 아니고 군복을 입은 미 4성장군도 아닙니다.
두 사람 뒤로 드러난 무성한 잡초가 마음에 걸렸고, 아직까지도 불편함과 안타까움이 여전합니다. 판문각 계단까지 틈을 비집고 나온 풀들이 어수선했죠.
두 건물 사이의 이 소로는 남북한을 잇는 최소한의 소통창구였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같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표류한 북한 선원들이 북송되고, 방북했다 돌아오는 우리 측 인원들의 귀환로가 됐죠.
논란이 되고 있는 2019년 11월 북한 선원 2명의 강제북송도 이 루트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여기에 잡초가 무성해졌다는 건 남북관계의 완전한 단절을 상징합니다. 북한이 최소한의 관리마저도 포기했다는 건 대남 차단막을 확실하게 치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겠죠.
물론 코로나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리스 부통령 방문 때도 북측 판문각에 흰색 방호복을 입은 군인이 창 너머로 촬영에 몰두하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과학적 검증 결과와는 관계없이 여전히 공기 중으로 코로나가 감염된다고 믿고 있는 북한으로선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만나 군사분계선 경계석을 함께 넘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지만 잡초제거와 유지보수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북한 당국의 뜻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정도면 잡초를 '키운다'고 할 정도겠죠.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8월 담화에서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말했던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남북관계는 문재인 정부 시기부터 꼬일대로 꼬였습니다. 3차례의 정상회담을 하고 더 없이 좋은 시절을 누리는 듯 했지만 어느 순간 북한은 냉담해졌고, 문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대가리' 운운하는 상황까지 번졌습니다.
문 전 대통령과 그때 정부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최근 김정은의 핵·미사일 위협과 남북관계 단절에 아닌보살하는 건 무책임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무슨 이유로 그 좋던 문재인-김정은 간 호흡이 헝클어졌는지 국민에게 밝혀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윤석열 정부에 귀띔은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킨 실타래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테니 말이죠.
다시 판문점 소통로가 열려 남북이 오갈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요. 북한 경비병들이 잡초제거 작업에 부산을 떨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