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2020년 시작부터 미국과 이란이 무력으로 충돌하면서 전쟁공포가 피어오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국가이기주의로 인한 혼돈이 만연하고 있다. 국제사회에 관용과 협조가 실종되고 평화와 공존번영이란 이념도 찾아보기 힘들다. 자유무역 질서가 손상되면서 무역분쟁이 일상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조화로운 시장질서에 기반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구촌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머리를 맞대 인류의 희망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국제사회의 말기적 현상을 짚어본다.
지금 세계는 빚이라는 이름의 올가미가 가계와 기업, 그리고 정부의 목을 죄고 있다. 그 말은 77억에 달하는 인류가 돈놀이의 볼모로 사로잡혔다는 뜻이다. 지난 십수년 동안 이어진 세계경제의 고성장은 빚으로 만들어진 거품이었고, 미국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는 거품을 만들어낸 인간들에 대한 일종의 심판이었다.
국제금융협회(IIF)가 발표한 '글로벌 부채 모니터'에서 2019년 1분기 세계 총부채 규모는 246.5조 달러를 기록했다. 이를 세계 전체 인구 77억명으로 나누면 1인당 부채 규모가 3만 달러 정도에 달한다. 또 이 부채규모는 전 세계 GDP의 320%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러한 글로벌 부채 증가는 전반적으로 세계가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빌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엄청난 빚 규모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금융위기 이후 위기 극복의 명분으로 통화를 무제한 풀었고 금리를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뜨렸다. 이로 인해 세계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하기는 했으나 경제주체들의 빚 부담이 크게 늘면서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경제를 침체시킬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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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정책금리 등 정책수단이 제자리에 복귀되지 않은 여건에서 자산가치가 하락하면 경제주체의 빚 상환 능력과 가처분소득이 더 떨어지고 정책대응마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세계경제는 자칫 1990년대 일본이 당했던 잃어버린 20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이에 국제통화기금(IMF)를 비롯한 주요 예측기관들은 빚 부담을 연착시키지 못할 경우 세계경제에 복합불황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복지 포퓰리즘(populism)'은 이런 문제를 한층 증폭시키고 있다. 2008년 시작된 미국의 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는 성격과 내용은 다르지만 발생 원인을 따져보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두 위기 모두 '빚이 만든 재앙'이란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탐욕에 빠진 투기꾼들이 과도한 '차입투자'를 하다 거품이 터진 것이고, 남유럽 국가들은 분에 넘치는 '차입복지'를 즐기다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지금은 공짜복지들이 달콤할지 몰라도 나중에 돌아올 부담은 엄청나다. 복지만능 주의는 중장기적으로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국가의 재정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달콤한 복지의 맛에 길들여지면 이를 줄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결코 공짜점심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증대하는 복지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들어간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할 빚이다. 결국은 우리가 갚아야 하고, 우리세대가 감당하지 못하면 후손들이 짊어져야 할 빚인 것이다.
지금 다수의 국가들은 재정악화와 파탄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재정악화는 정부의 역할 확대, 특히 복지재정 지출의 증가에 기인한다. 서구를 중심으로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현대 자유주의 경제사회에서는 갈수록 정부의 역할, 특히 복지증진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복지예산이 전체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의 재정상황을 살펴보자. 우선 세계 최대 규모의 국가부채를 지닌 미국은 오래 전부터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의 쌍둥이 적자에 시달려왔지만, 특히 2012년 말부터는 심각한 재정위기 국면에 처해 있다. 재정적자 규모가 이미 GDP의 100%를 웃돌고 있다. 이로 인해 툭하면 연방정부의 업무가 일시 정지되는 정부폐쇄(shutdown) 조치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국가 모델인 서구유럽 국가들의 최근 사정은 어떨까. 유로 존은 아직도 재정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의 재정위기는 그동안 내부에 잠재해 있던 다양한 문제들이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계기로 표출된 것이다. 무엇보다 과다한 복지수요 충족을 위한 재정지출 증가가 문제였다. 이에 따라 그리스를 시작으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 소위 PIGS라고 불리는 국가들은 이미 구제금융을 지원받았다. 특히 그리스는 재정파탄으로 국가부도(default) 위기 직전까지 갔다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 주권을 훼손당했고 국민들은 심각한 불황과 고실업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됐다.
유럽의 재정악화 문제는 비단 이들뿐만 아니라 독일과 네덜란드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 EU 국가들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이미 100%를 넘어섰으며, 여타 대부분의 EU 회원국들도 그 비율이 재정건전성 판단 기준인 60%를 초과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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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떠한가. 일본은 규모 면에서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고 1인당 국민소득 또한 4만 달러에 달하는 탄탄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일본의 국가부채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규모 면에서는 세계 최대의 재정적자 국가는 미국이다. 그러나 GDP 대비 재정적자의 비중은 일본이 200%를 상회함으로써 세계 최대다. 더욱이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재정적자 규모는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중국 또한 재정안정성을 장담하지 못한다. 물론 중국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중은 아직 50% 안쪽이어서 미국과 일본이 각각 100%, 200%를 넘어선 것에 비하면 외견상으로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재정통계는 신빙성이 부족하다. 여기에 지방정부의 부채는 중앙정부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방정부는 개발을 명분으로 엄청난 자금을 그림자금융을 통해 가져다 사용했다. 이들은 장부외부채로 그 규모마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다.
실제로 중국의 기업·가계·정부를 포괄한 총부채는 GDP의 3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중국의 총부채가 전 세계 GDP의 15%에 달해 세계경제의 뇌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더욱이 앞으로의 재정상황은 경기둔화로 한층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이 둔화되자 이에 맞서기 위해 민간부문 대출을 촉진하는 한편, 정부재정에서도 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 투자에 지원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는 결국 높은 부채비율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채증가는 단기적으로는 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겠지만, 중기적으로는 민간소비와 투자를 둔화시키면서 성장세를 저상시킨다. 이는 재정수입 축소와 재정악화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역시 갈수록 재정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GDP 대비 국가부채 규모가 40% 수준으로 아직까지는 국제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그러나 실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안심할 수 없다.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 등 정부재정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4대 공적연금을 비롯해 기초연금, 건강보험 등 인구 고령화와 관련된 지출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남북통일 같은 불확실성이 더해지면 국가채무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까지 치솟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편, 앞으로의 세계 재정파탄은 무엇보다도 연금파탄에서 비롯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연금이 부족하거나 파탄날 경우 종국적으로는 재정에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상황과 함께, 연금복지를 중시하는 현대 국가들의 복지사회 구현이라는 정책방향에서 비롯된다. 아직도 진행 중인 PIGS 국가를 위시한 유럽의 재정위기가 과다한 연금복지 지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이를 잘 입증해준다. 이러한 우려는 비단 유럽뿐만 아니라 거의 대다수 국가들에게 지워진 과제다.
일본 금융청이 2019년 6월 발표한 '고령사회의 자산 형성과 관리에 관한 보고서'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보고서의 주된 내용은 60대 부부가 30년 정도 더 살려면 연금 외에 2000만엔(약 2억150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일종의 '100세 시대에 대비한 금융 조언'이었다. 그럼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것은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28%인 '초고령 사회' 일본에서는 연금문제가 그 무엇보다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연금에 대한 불신이 있던 상황에서 정부 스스로가 제도 미비를 인정한 것처럼 비쳐졌던 것이다. 중국 또한 연금파탄을 걱정하는 분위기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2020년 연금 부족액이 8900억 위안(약 150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 국가들의 연금은 기존의 연금제도 틀 속에서도 조만간 고갈될 우려를 안고 있다. 현행 연금제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수명이 100세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는 100세 인생시대가 보편화되고 있으며, 더욱이 구글이 추진 중인 '인간 500세 프로젝트'가 실현된다면 더 이상 연금과 연금제도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여기에 재정수입마저 대량 실업난과 소득 불균형심화 등에 따라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볼 때 연금파탄과 재정파탄의 현상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이철환 mofelee@hanmail.net
▶이철환은 재정경제부 국고국장과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등을 지냈다.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암호화폐의 경제학', '인공지능과 미래경제', '을의 눈물'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