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2020년 시작부터 미국과 이란이 무력으로 충돌하면서 전쟁공포가 피어오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국가이기주의로 인한 혼돈이 만연하고 있다. 국제사회에 관용과 협조가 실종되고 평화와 공존번영이란 이념도 찾아보기 힘들다. 자유무역 질서가 손상되면서 무역분쟁이 일상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조화로운 시장질서에 기반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구촌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머리를 맞대 인류의 희망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국제사회의 말기적 현상을 짚어본다.
지금 세계는 갈수록 국가이기주의 성향이 짙어지고 있다. 보수 우익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국가이기주의는 일반적으로 국가 경제사정이 좋지 않거나 사회혼란을 겪을 때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1960년경 동서독 분단된 상황에서 민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자 대두된 '신나치주의(Neo-Nazism)'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나치 독일 이후에 민족사회주의를 재수용하는 사상이나 움직임을 말한다.
특히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실업문제와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더 많은 신나치주의 단체들이 생겨났다. 추종자 대부분은 구동독 비행청소년이었다. 신나치는 폭력적 양상을 보였고 '외국인은 물러가라' '독일인을 위한 독일' 등 구호 아래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 숙소를 공격하고 테러와 방화를 저질렀다. 이들은 자신들을 나치 추종자가 아닌 국가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데 이 사조는 점차 유럽으로 확산됐고 나중에는 미국에서도 호응을 얻어 많은 동조세력이 나타났다. 더욱이 국제사회가 점차 보수 우익화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그 세력이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한편,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신보수주의자를 뜻하는 '네오콘(neo conservative)' 세력이 등장했다. 그 성향은 미국적 가치가 최선이며 무력 사용을 불사한다는 공격적 태도로 요약할 수 있다. 네오나치즘이 미국식으로 변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나라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고립을 즐기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국제문제에 개입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세울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기독교 도덕관을 궁극의 가치로 보고, 이를 전 세계에 전파시키는 것을 고귀한 사명으로 여겼다.
네오콘들은 힘이 곧 정의라는 구호 아래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경찰 역할을 맡아야 정세 안정과 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악의 축(Axis of Evil)'이란 단어를 만들어내고 중동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이 네오콘들은 특히 레이건 및 부시 행정부에서 위세를 떨쳤다.
미국 국가이기주의 성향은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층 심화됐다. 물론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기존 네오콘 입장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미국이 다른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수혜를 공여해온 결과 경제력이 많이 쇠퇴해졌다고 주장했다. 급부상하는 중국에 대해서도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집권하자마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국우선주의를 펼쳐나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반 이민 행정명령 서명, 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이란 핵협상 파기,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 유네스코 탈퇴 등 미국이 추구해온 가치와 이상에 배치되는 정책을 잇달아 쏟아내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훼손했다. 동맹 관계에도 수혜자 부담 원칙을 적용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쓸모없는 동맹'이라고 깎아내렸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 반한다고 여기면 무차별적인 관세폭탄 조치를 취하고 있다.
유럽도 자국우선주의 성향이 강해지기는 마찬가지다. 2015년 9월,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해안가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중동 난민 남자아이의 시신 사진이었다. 전쟁을 피해 유럽으로 피신하던 중 사망, 터키 해안가로 떠밀려온 것이었다. 이 사진은 그동안 들끓던 유럽을 위시한 서구사회의 반 난민 분위기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물론 그동안 난민들의 사고소식은 이어지고 있었다. 배가 난파돼 바다에 수장당하거나 배를 타기는 했지만 브로커의 농간에 속아 돈만 빼앗긴 채 본국으로 재송환되는 난민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유럽사회는 이런 인권유린 사태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지냈다.
사실 유럽은 오래 전부터 난민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 난민들이 부유하고 치안이 안정된 서유럽 지역으로 계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이 본격적으로 난민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2010~2011년 아랍권 민주화 운동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난민이 생기면서부터다. 난민 일부는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배를 타고 무작정 지중해를 건넜다. 낡은 배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작정 올라타다 보니 침몰사고로 엄청난 희생이 발생했다. 식량부족과 전염병도 난민들을 괴롭혔다.
특히 2015년부터 시리아 내전 피해자들이 대거 유럽으로 몰려들면서 상황은 한층 심각해진다. 난민이 수백만 명에 달했고, 사건사고 또한 급격히 늘어났다. 급기야 유럽 각국과 캐나다, 미국, 터키, 아랍에미리트(UAE), 러시아 등에서 난민 수용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취했다.
난민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여론 역시 급증했다. 난민 수용 때문에 국가의 빚이 늘고 세금이 오르는 등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장기간 경제위기로 외국인혐오 분위기 역시 확산됐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자 반 난민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이 같이 2015년부터 본격화된 난민 위기는 유럽 각국에 극우와 포퓰리즘(populism)이 확산되는 기폭제가 됐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데 난민들까지 들어와 정부 예산을 갉아먹고 일자리를 뺏는다는 불만이 동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퍼졌다. 이에 개별 국가의 선거 뿐만 아니라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자국이익을 우선하는 정당의 승리가 이어졌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키로 결정한 '브렉시트(Brexit)'도 따지고 보면 이런 배경 속에서 가능했다. 다시 말해 영국은 다른 유럽나라들로부터 난민, 이민자와 노동자 유입을 억제하고 국경통제를 강화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난민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명쾌한 해결책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유럽을 위시한 서구사회의 난민을 대하는 태도에서 국가이기주의가 심화되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간 인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왔던 서구사회의 변화된 모습에서, 어떤 가치보다 자국 이익을 앞세우는 국제사회의 맨얼굴을 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자유 진영의 패권국이 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인권·법치 등 보편적 가치, 자유시장경제원칙에 입각한 각종 제도와 규범을 통해 미국의 이익에 최적화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했다. 그것이 다른 나라들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소련의 몰락으로 미국이 전 지구적 패권국이 되면서 미국의 이미지를 본떠 만든 자유주의 질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글로벌 질서로 확장됐다. 그로부터 약 한 세대 만에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미국과 함께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오던 유럽도 점차 자국우선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국제사회에서는 더 이상 관용과 협조의 정신과 자세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중도 약해지고 있다. 그보다는 자국의 경제적 실익이 우선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타산에 따라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적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아직 여유가 없는 개발도상국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한마디로 세상은 점차 평화와 공존번영이라는 숭고한 정신과 이념이 와해되고, 약육강식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원초적 동물사회로 회귀하고 있다.
▶이철환은 재정경제부 국고국장과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등을 지냈다.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암호화폐의 경제학', '인공지능과 미래경제', '을의 눈물'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