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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의 콘비벤시아 스페인] 알람브라의 추억③

기사입력 : 2019년07월18일 11:30

최종수정 : 2019년07월18일 11:30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을 찾는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다. 그저 이국적 풍광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 이끌릴 수도 있다. 스페인의 음식과 플라멩코, 투우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스페인을 얼마나 알고 가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스페인이 '혼혈의 나라'라는 사실을 곧잘 망각한다. 스페인이야말로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혼혈로 이뤄진 나라다. 이 사실을 무시한 채 들여다보는 스페인은 겉껍데기일 따름이다. 스페인 문화의 기저에 있는 '콘비벤시아', 즉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모른다면, 사실상 올바른 스페인 읽기는 실패한 것이다. 콘비벤시아 스페인. 그 기층문화의 세계로 걸어들어가보자.

1212년 세비야 함락 후 기독교 왕국들에게 밀리면서도 그라나다가 280년이라는 긴 세월을 더 버틴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믿지 않는 자(기독교인들을 지칭)’에 의해 언제 정복당할지 모르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알람브라처럼 최고의 예술 공간을 가꿔놓은 사실은 더더욱 기적이다.

물론 쇠락기의 그라나다는 기독교 왕국의 군주에게 파리아스라고 불린 보호비 명목의 조공을 바치며 연명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외교 수완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알람브라의 분수는 놀라운 이슬람 관개 시스템의 개가다.

나스리드 왕조 시대에 알람브라는 성채 외곽의 헤네랄리페 궁전의 정원을 위한 관개용 수로를 포함한 관개 시스템을 갖춘 자족형 왕궁으로 탈바꿈했다. 이전의 알람브라는 물 문제를 알바이신(Albaicín)으로부터 흘러오는 빗물을 저장하는 수조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높은 언덕 위 요새까지 멋들어진 수로를 건설할 수 있는 아랍 기술로 알람브라는 방어에 고통을 수반하는 수비형 성채가 아니라 안락함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갖춘 왕궁 도시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알람브라는 무어인 시인들이 ‘에메랄드 속의 진주’라고 아름다움을 칭송할만큼 잘 조성된 정원으로 둘러싸인 성채로 가꿔졌다. 이후 보석에 둘러싸여도 빛나는 진주처럼 그 존재감을 확실히 다진 이 궁전은 물의 궁전, 빛의 궁전 그리고 소리의 궁전이라는 궁극의 칭송을 더 획득한다.

녹음이 우거진 정원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분수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위 시인들의 표현이 더 실감난다. 사막에 터전을 둔 유목민 출신들의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알람브라는 믈의 궁전, 빛의 궁전, 소리의 궁전이다.

아마 그래서일까. 1492년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드 2세와 카스티야의 왕비 이사벨라의 부부 연합군이 성채를 포위했을 때 당시 무하마드 12세인 보아브딜은 격렬한 농성전을 택하는 대신 전 재산을 바치고 목숨을 부지한 채 스스로 알람브라를 떠나는 것으로 손쉽게 항복했다.

당시 그라나다를 비롯해 코르도바나 세비야 등 도시를 근거지로 한 무슬림 왕조들의 멸망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슬림 왕국들이 하나의 강력한 지배자 아래 뭉쳐 있는 것이 아니고 24개의 작은 군소 왕국들이 서로 경쟁하는 이른바 타이파(Taifa) 체제였기 때문이다. 말라가나 론다 등도 도시 하나가 곧 왕국이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 연합군에 맞서 서로 합심하는 공동 전선을 펴기보다는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따라서 기독교 연합군 쪽에서 볼때 이들을 격리시킨 채 하나씩 차례로 격파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특히 타이파 왕국들은 영토를 빼앗고 빼앗기는 땅 싸움보다는 서로 문화와 학술의 수준을 가지고 경쟁하는 이른바 관용과 공존의 콘비벤시아(Convivencia) 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왔을 때 가지고 있던 정복욕과 ‘사막의 전사’로서 용맹성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반면 톨레도 위 북쪽의 5개 기독교 왕국들은 신앙의 힘으로 이교도들을 몰아내겠다는 의지로 서로 똘똘 뭉쳐 패기가 충만했다.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말을 타면서 강인함을 길렀던 유목민들이 화려한 꽃을 피우는 정원을 가꾸고 목욕을 즐기게 된 그 순간부터 왕조의 붕괴는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톨레도 북쪽의 기독교 왕족들이 가죽옷을 입고 숲속에서 사냥감을 쫒으며 약탈과 점령의 칼을 갈고 있을 때,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은 목욕과 향수를 즐기고 카펫 깔린 저택에서 비단 옷을 입고 도자기 그릇의 성찬을 음미하면서 그리스 철학의 여러 주제들을 토론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니 이들이 어떻게 적수가 됐으랴. 더구나 그런 심성으로 아름다운 알람브라가 치열한 전투로 파괴의 길로 가는 걸 어떻게 볼 수 있었으랴.

1492년 그라나다 함락과 함께 알람브라의 손상이 시작됐다. 그림과 회반죽이 칠해졌고 도금으로 덮이기도 했다. 가구는 손상되거나 옮겨졌다. 카를레스 5세(재위 1516~1556)는 유럽식 방을 더 만들기 위해 1527년 겨울궁전의 대부분을 허물고 그 자리에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을 새로 만들었다. 이 궁전은 완성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알람브라에서 커다란 덩치의 한 흉물로 남아 있다. 필리프 5세(재위 1700~1746) 역시 궁전 중앙 무어 양식의 방들을 이탈리아식으로 개조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은 더 심해졌다. 침략자들의 문화유산 파괴는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인간의 야만성을 잘 나타낸다. 1812년 프랑스의 세바스찬 공작은 몇 개의 탑을 허물었다. 당시 궁전 내부는 겨우 살아남았지만, 나폴레옹에 의해 치명타를 맞을 위기에 처했다. 나폴레옹 군대의 원래 계획은 궁전 전체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어인들의 위대한 금자탑이 화약에 의해 붕괴되기 직전, 나폴레옹 휘하 부대의 한 지각 있는 군인(이름이 알려지지 않은)이 뇌관의 심지를 제거했다. 그렇게 알람브라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1821년 지진이 이 궁전에 또 한 번의 상처를 냈다.

국왕 페르디난드 7세가 알람브라의 복원 임무를 정식 부여한 것은 1830년이었지만, 이미 1828년부터 건축가 호세 콘트레아스에 의해 복원 작업이 실시되고 있었다. 호세는 20여 년 동안 알람브라의 복원에 매달렸다.

1847년 그가 사망하자 작업은 아들인 라파엘에게 유업으로 남겨졌다. 라파엘 역시 1890년 사망할 때까지 보석처럼 빛나는 이 궁전의 분수와 정원과 수로 등을 살려내는 데 진력했다. 라파엘의 사망 이후 복원 작업은 그 아들에게 다시 넘어갔다.

알람브라는 3대에 걸친 호세 일가족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그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알람브라를 보면서 감탄할 수 있는 것은 이렇듯 폭파로부터 궁전을 지켜낸 한 무명 군인의 용기와 3대에 걸친 호세 일가족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어떤 일도 마찬가지지만,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는 법이다.

조용준 digibobos@hanmail.net

작가 겸 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전 동아일보 기자, <주간동아> 편집장. <유럽 도자기 여행> 시리즈, <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 등 다수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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