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1989년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시위가 인민해방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당하고 30년. 톈안먼 시위 무력진압이 지금의 공산당 체계를 위기에서 구했을 지는 몰라도 당시 사건은 인민해방군에 여전한 상처로 남아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4일 보도했다.
중국 톈안먼 광장에 있는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 초상화 2019.05.07. [사진=로이터 뉴스핌] |
톈안먼 사태는 1989년 6월 4일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민주화와 정치개혁을 요구한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군 장갑차 등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 많은 무고한 시민이 희생한 사건이다.
유혈사태 이후 해당 민주화 운동을 '반 혁명적 폭란'이 아닌 '정치적 혼란' 속 하나의 사건으로 유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인민해방군이었다고 SCMP는 두 명의 전직 군 관리를 인용했다. 인민군 사이에서 이같은 언어적 유화는 무력진압에 대해 군부가 얼만큼 부끄러움을 느끼고 염려했는 지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특히 당시 인민군은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중국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신임을 받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과 같은 정정혼란 때도 군부는 개입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들이 있었기에 중국의 개혁개방도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인민해방군부가 당시 시위 현장에 탱크를 보내고,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눌 정당성이 있었느냐가 핵심 문제다. 시위 진압은 서면이 아닌 구두 지시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지낸 바 있는 익명의 연구원은 "톈안먼 사태가 어느 날 다시 평가될 것으로 믿고 있다. 궁극적으로 책임은 이를 지휘한 군지도부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톈안먼 사태에서 사망한 무고한 희생자들은 수백명에서, 1천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무력진압은 3일부터 4일 오전까지 밤새 이어졌다. 이에 익명의 한 전직 인민해방군 관리는 매체에 "(희생자) 한 명이 됐던 1만명이 됐던 (군이) 무장하지 않은 일반인을 쏜 것은 잘못됐다. 그러나 (군대는) 당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이 더러운 임무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전직 군 연구원들 증언에 따르면 당시 무력진압에 개입된 많은 군 고위 관리들이 시위 무력진압 명령에 의구심을 내비쳤다고 한다. 당시 덩샤오핑(鄧小平)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의 서면 명령이 없어서다. 이에 무력진압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이는 자오쯔양(趙紫陽) 당 총서기다. 이후 톈안먼 시위 무력진압은 '당이 군을 명령한다'는 원칙을 깼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퇴직한 한 인민해방군 관리는 유혈진압은 어쩔 수 없었다며, 당시 "6월 4일까지 톈안먼 광장을 깨끗이 해라. 우리의 길에 방해되는 이는 그 누구도 국가의 적이다"가 명령이었다고 알렸다. 광장에 시위대를 해산 시켜야 했던 군은 처음에는 공중에 총발을 겨눠 겁을 주려고 했지만, 어딘가에 맞고 튕겨나간 총알은 시민들을 다치게 했고 당황한 일부 군인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톈안먼 시위 진압에 얼만큼의 군이 동원됐는 지 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대 20만명이 동원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결국, 중국 군에 심리적 상처로 남은 톈안먼 사태는 "정치적 풍파"로 언어를 유화시켰다. 해당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97년 중국 군 백과사전이며, 이는 톈안먼 사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달리 하려는 인민해방군 고문들의 노력이었다고 매체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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