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삼성증권 개설된 이 회장 차명계좌 거래내역만 못찾아
삼성증권, 특검 시행 1년 전 과거 기록 깨끗이 삭제
차명계좌 보유주식 현재 시가 2300억…과징금은 30억
[뉴스핌=우수연 기자] 미국 법정드라마를 보면 '합리적 의심'이란 법률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합리적 의심이란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구체적 논거에 기반한 의심을 뜻한다. 기자들의 취재활동에도 이 같은 의심은 강력한 취재동기가 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한 금융감독원 검사가 지난주 마무리됐다. 법제처의 유권해석에 따라 실명제 시행일(1993년 8월 12일) 이전에 개설된 27개 차명계좌에 대한 검사다. 1993년 당시 계좌에는 총 61억8000만원의 삼성계열사 주식이 보관돼 있었다.
27개 계좌는 신한금융투자,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대우 그리고 삼성증권 등 4개 증권사에 나눠 만들어졌다. 금감원이 처음 자료를 요구했을 때 증권사들은 해당 계좌 내역이 10년 이전의 내용이라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금감원이 직접 조사를 해보니 결과는 달랐다. 예탁결제원에서 받은 1993년 당시 주주명부를 기준으로 증권사 시스템에 저장된 별도의 데이터베이스에서 해당 거래 내역들을 찾아냈다.
금감원은 다만 3개 증권사에선 계좌 거래내역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삼성증권에선 아무런 기록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했다. 여타 증권사들의 경우 별도의 백업DB에 남아있었던 기록이 삼성증권에는 깨끗하게 지워져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증권사들의 IT기술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삼성증권의 고객정보 기록관리가 유독 철저해서일까. 삼성증권 입장을 들어봤다. 삼성증권은 2007년 초부터 위탁 IT업체와 함께 고객정보 관련 과거 기록들을 지우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며 2007년말 이 같은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2006년부터 이건희 회장 비자금과 관련한 특검 필요성이 대두됐고 2007년말에는 삼성 특검팀이 꾸려졌다. 2008년부터는 특검팀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해당 그룹의 특검 수사를 앞두고 있는 시기에 계열사인 삼성증권이 과거 기록들을 백업 DB에 남지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지우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점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정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대대적인 작업을 벌였다는 '합리적 의심'이 고개를 드는 대목이다.
현행법상 증권사의 기록보관 의무기간은 10년이다. 따라서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고해서 금융당국 차원에서 별도의 조치를 취할 수도 없다. 결국 금감원은 1993년 이전 삼성증권에 개설된 이 회장 차명계좌(4개 계좌)에 대한 거래내역을 확보하지 못했다. 예탁결제원에서 얻은 주주명부 등을 통해 당시 계좌 잔액을 유추해내는 정도다.
현재까지 파악된 이 회장의 차명계좌중 증권사에 개설된 계좌는 모두 1133개다. 이중 삼성증권에 개설된 계좌만 918개로 전체의 81%에 육박했다. 금융실명제 이전에 개설된 계좌가 27개였고 이후에 개설된 계좌가 1106개였다.(증권 계좌 기준) 그만큼 이 회장의 개인적인 자산관리에서 삼성증권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유권해석에 따라 검사대상이 된 27개 차명계좌에는 대부분 삼성계열사 주식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금융실명제 시행 당시 61억원에 불과했던 해당 삼성계열사 주식들은 현재 시가로 2300억원에 달한다. 그런데도 현행법상 금융당국이 부과할 수 있는 과징금은 30억원 수준이란 점도 아이러니하다.
현재 금감원은 이 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해 계열사 지분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지분 공시법 위반이나 미공개정보를 활용한 불공정거래가 없었는지 여부를 살펴보고 있다. 다만 현행 제도 아래에서는 추가 조사를 벌인다 해도 앞선 사례처럼 '쥐꼬리 벌금'에 그칠 공산이 크다. 금융실명제 이후 개설된 차명계좌에 대해서도 과징금을 부과하는 등 법 개정을 통한 적극적인 추징이 필요해 보인다.
[뉴스핌 Newspim] 우수연 기자 (yesim@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