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중파 사극이 인기를 끌면서 역사 속 팩트도 주목 받고 있다. <사진=KBS> |
[뉴스핌=김세혁 기자] 침체됐던 공중파 사극이 최근 인기를 끌면서 역사적 팩트에 시선이 집중된다. 특히 효명세자(1809~1830)와 홍경래의 난(1811) 사이의 상관관계에 관심이 쏠린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1800~1834) 재위 시절인 1811년 12월 발발한 농민반란이다. 약 5개월간 이어진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소농민들의 난으로, 단명한 효명세자와도 관련이 있다.
홍경래의 난은 당시 조선사회가 토지겸병 등 큰 변화를 겪으며 구체화됐다. 17~18세기 유행한 토지겸병은 쉽게 말해 남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 토지를 넓히는 행위였다. 당시는 토지겸병이 진전돼 서민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부농이 득세했다. 농업 생산기술이 발달하고 토지겸병에 따라 시장이 확대되면서 양반이 아니더라도 많은 농지를 소유한 부자가 나타났다.
문제는 대다수 소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땅을 살 형편이 못됐으므로 급속도로 몰락해 영세빈농이나 전호로 전락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농업은 물론 상공업도 마찬가지였다.
홍경래의 난은 이 같은 격동의 시기에 벌어졌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평민 홍경래는 지역 향시를 통과하고 유교와 풍수지리를 익혔다. 대과에 응시한 홍경래는 낙방하는 과정에서 시골 출신이라며 차별을 심하게 당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홍경래는 세상을 바꿀 마음을 품었다.
홍경래는 난을 일으키기 10여 년 전부터 발품을 팔아 정세를 파악하고 제 편을 들였다. 상인 우군칙이 대표적 인사다. 양반 출신 지식인 김사용과 김창시, 역노 출신 부호 이희저, 평민 출신 홍총각과 몰락한 향족 이제초 등도 수뇌부에 포함됐다. 박천의 김혜철이나 안주의 나대곤 등 상인들은 아예 수하를 거느리고 홍경래 밑으로 들어왔다.
준비를 마친 홍경래는 1811년(순조 11년) 12월15일 평양 대동관을 불태우려 했다. 화약통이 터지지 않자 이들은 사흘 뒤인 12월18일 다시 거병했는데, 이것이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 일파는 선봉대 홍총각이 가산·박천·태천을 파죽지세로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제초가 이끄는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1월3일 용천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전열을 정비한 안주 관군에 12월29일 박천 송림에서 패하면서 홍경래 측은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홍경래는 의주의 김견신과 허항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에 더욱 흔들렸다. 결국 한겨울에 정주성에 고립된 홍경래는 1812년 4월19일 진압됐다. 체포된 인원이 3000명에 달했는데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00여명이 일시에 처형됐다.
홍경래는 1812년 정주성 전투에서 죽었다고 기록됐지만 일부에선 그가 전사하지 않고 숨어 후사를 도모했다는 설이 돌았다. 실제로 현재 방송 중인 공중파 사극에서도 홍경래는 난이 진압된 뒤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설정됐다.
효명세자는 3세 때 홍경래의 난을 겪었지만 어린 시절이라 기억에 남은 바는 없었다. 그러나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에 나선 무렵부터는 홍경래의 이름을 자주 접했다. 효명세자에게 홍경래는 어찌됐던 조선의 사회 근간을 흔들었고 왕조에 도전한 역도로 인식됐다.
효명세자는 장성해 대리청정에 나설 무렵 홍경래의 난과 관련된 인물과 얽혔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병연이다. 실존인물인 김병연은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선천부사 김익순의 손자로, 조부의 행적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규탄하는 시를 써 급제했다. 훗날 이를 알아챈 김병연은 하늘을 볼 낯이 없는 죄인이라 해서 삿갓을 쓰고 살았는데 그 유명한 김삿갓이다.
[뉴스핌 Newspim] 김세혁 기자 (starzoobo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