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가버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다
- 고향생각 2
겨울은 낭만이 가득했다. 흰 눈을 맞으며 강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꼬마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눈을 뭉쳐서 던지며 눈싸움도 했다. 얼어붙은 논은 동네아이들 놀이터가 된다. 한쪽에서는 팽이치기를 하며 놀고 있고 저쪽에서는 미끄럼을 지치며 고함을 질러댄다. 깊어가는 겨울밤이면 화롯불을 피워놓고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평소 조용하던 시골 고향마을에도 사람들이 북적대며 활기를 띄는 이벤트가 있었다. 시골 5일장과 학교 운동회 날이 바로 그것이다. 5일장이 서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평소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을 펼쳐놓아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장터에 나오면 사람구경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장터에는 농수산물, 약초, 의류 같은 물건은 물론이고 씨암탉과 염소 등 온갖 것이 다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온듯한 박람회요 전시장이었다. 물건을 사고팔면서 서로 흥정을 한다. 그러는 동안 사람과 사람 간의 소박하고도 훈훈한 정감이 묻어나고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 넘쳤다.
시골마을에 학교 운동회가 열릴라 치면 그야말로 온 동네가 잔칫집 분위기였다. 운동회가 있기 며칠 전부터 온 동네는 시끌벅적해진다. 한 달 전부터 예행연습을 하느라 땡볕에 온몸을 그을어 가며 매스게임과 줄다리기, 달리기 등을 연습한다. 응원연습도 열심이다. 운동회가 있는 전날 밤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가슴이 설레기도 했지만 혹시 비라도 오면 어떡하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운동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님과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코흘리개 어린 동생까지도 함께 모여 즐기는 말 그대로 한바탕 축제였다. 학교주변에는 풍선장수, 엿장수, 뻥튀기장수, 아이스크림장수, 솜사탕 장수들도 귀신처럼 알고 모여 들었다.
고향에 대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에게 고향이란 반목과 갈등 그리고 회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사랑하던 이웃집 처녀가 도시에서 온 뜨내기를 따라 야간 도주해버린 경우는 차라리 사정이 나은 편이다. 주인집 땅에 빌붙어 소작농으로 살면서 항상 주인 영감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에게 조차도 굽실거리던 아버지.
그 꼴이 보기 싫어서 하루는 거들먹거리는 주인집 아들을 두들겨 패고는 고향을 등지게 된 사연도 있다. 6․25전쟁 때 빨갱이와 손잡았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던 김 노인은 목을 매달았다. 그 이후 김 노인의 손녀딸은 어디론가 떠난 뒤 매춘부가 되었다는 소문만 들려왔다.
그들은 고향이 싫었다. 고향에서 받은 상처를 잊기 위해 일부러 고향을 외면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들도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면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한다. 한번 만이라도 고향을 찾아보기 원한다. 그래서 고향은 부모와 같은 존재인가 보다. 아무리 아픈 기억으로 가득 차있거나, 잊고 싶어 해도 그러지를 못하는 그런 존재인가 보다. 이 가을날, 혼자서 고향 길을 찾아 나서 보라!
*저자 이철환 프로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초빙위원
-현 단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재직)
*저서- 과천청사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한국경제의 선택, 14일간의 경제여행, 14일간의 (글로벌)금융여행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