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을 때의 강렬함은 광주 사태 이후의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정국과 그런 흐름 속에 이어지는 캠퍼스 분위기, 혜진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등에 쌓여 있던 내 가슴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내게 십촌 되는 진천 할아버지는 한의사이며 역사에도 조예가 깊은 터라 그런 면도 있을 것이었다. 그날. 나는 그의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동행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를 배웅하고 난 후 할아버지와 저녁을 먹으며 얘기를 들었다. 한약 냄새 진동하는 그 집에서 들은 말들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증조부로 인해 집안이 절단 났다는 것. 참혹하게 망했다는 것. 그러나 그는 뛰어난 선각자며 대쪽 같은 삶을 산 거목이었다는 것. 대대로 우리 집안이 대제학, 문장가, 청백리, 학자, 충절, 효자, 열녀, 효부를 배출해 내온 명문가이지만 그는 그 틀마저 부수고 과감하게 나아갔다는 것. 일제 시대에 항일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자였다는 것.
기독교를 선구적으로 받아들여 청주 초대교회의 장로가 되고 동생을 목사가 되게 해 교회 운동에 헌신했지만 기독교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개혁, 계몽, 민족 독립, 근대화에 고심하는 당대의 지사(志士)들과 조직을 만들어 교육 구국 운동에 앞장섰다는 것. 증조부의 사람됨을 알아 본 언더우드가 증조부를 달리 크게 쓰기 위해 미국으로 보내 후원하겠다고 설득했으나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며 끝끝내 이 땅을 고수했다는 것.
사실 증조부는 선교사들이 제대로 선교 사업을 못한다고 미워하며 예수의 삶 그대로를 실천하며 살았다는 것. 홍명희와도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는 것. 시를 같이 쓰고 사상을 교환하며 대의의 불꽃을 함께 지펴나갔다는 것.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기독교 사상, 민족 문제 등을 아우르는 만민사해주의의 큰 틀 속에 녹여 불 같은 마음으로 밀고 나갔다는 것. 일본 순경들로부터 늘 감시의 대상이었으며 인물이 커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지만 수차례 옥고를 치뤘다는 것.
일제시대, 암흑기이며 농경시대이던 그때, 미래의 세계는 편협한 봉건, 유교 사회를 벗어나 정치적으로는 평등 사회, 경제적으로는 기능 사회가 도래한다는 신념 하에 그 방향으로의 과감한 실천을 해나갔다는 것. 실제로 자식 교육면에서도, 일차산업이 지배적인 당시에 아들들을 각지에 보내 보석세공사, 테일러, 예술가로 키운 것.
여성도 눈을 떠야 한다며 맏며느리를 동경으로 유학을 보낸 것 등등 당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일들을 강력하게 실천하셨다. 그러나 내게 가장 감동적이고 아리도록 가슴 저민 것은 이런 뻔한 레파토리들이 아니라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보인, 정신의 칼 같은 고결함과 온몸으로 뚫고 나간 빛나는 투혼이었다.
진천 할아버지와의 그날 밤 이후 증조부에 대한 생각은 내 안을 더욱 깊게 휘저었다. 어머니가 교동집 안방에 있던 장롱 속에서 몇 겹으로 조심조심 접은 오래된 한지 한 장을 꺼내 내게 보여준 것이 정확히 언제인가는 기억에 없다.
대학 때 데모방지용으로 보여준 것인지, 대학 말부터 엉뚱한 사교에 빠져 졸업 후 취직도 진학도 포기한채 이상한 도표들을 들고 미친듯이 돌아다닐 때 정신 차리라고 보여준 것인지. 그것은 증조부가 돌아가시기 직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살을 결행하시기 직전에 자필 유서였다.
붉은 피로 쓴. 내게 그 충격은 상당히 컸다. 두려움이나 공포보다는 말 못할 숙연함, 형언할 수 없는 애절함,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왔다. 어린 시절 경찰들이 우리 집을 찾으면 아무 죄도 없이 쉬쉬하며 집 안 공기가 사과의 푸른 멍처럼 굳어갔는지, 할머니가 그 많은 옛날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해주면서도 가끔 말을 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지, 잘 나가던 우리 집안이 왜 6.25 이후 쫄딱 망했는지, 그 한 장의 유서로 인해 완전히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