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어렸을 때는 할머니, 삼촌들과 함께 살았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증조부, 증조모, 할아버지까지 포함한 대가족이 오손도손 살았던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중의 하나이다. 마당이 넓고 잿빛 기와로 덮힌 이 고풍스런 한옥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음을 나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서울로 올라가던 1979년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며 “진석아, 데모하면 안 된다. 우리 집은 데모하면 큰일 나는 집안여” 라고 말할 때도 그 비밀을 눈치채지 못했다.
대학 2학년 때 캠퍼스는 최루탄 가스와 함성으로 뒤덮였다. 1학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성격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 틈에 끼어 돌을 던지거나 불문과 사무실 창유리를 통해 매캐한 포연을 바라보곤 했다. 포연이 없는 날엔 도서관 옆 잔디에 누워 있거나 자취방에서 창비 서적이나 김승옥, 레이몽 라디게, 파울 첼란 등을 읽었다.
혜진과는 지난 겨울 눈오는 밤 부평의 그녀의 집 앞에서 헤어진 후 아픔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봄 학기에 들어서자 그녀로부터 뜻밖에 애틋한 편지 한 장이 날라왔다. 보들레르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는 수업 시간인데 뒤에서 과동기 한 명이 등을 쿡 찌르더니 건네준 것이었다. 받아 보니 분홍빛 봉투에 ‘혜진’이라고 써 있자 너무 놀라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일어서서 걸어나갔다. 과사무실 곁엔 다소 경사진 잔디밭이 있었다. 위쪽에 앉아 읽어나갔다.
자기도 힘이 들었으며 겨울 내내 이불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 봄은 저만치 있는데 봄이 멀어지는 것 같아서, 자기의 개나리는 피지 않을 것 같아서 초조하다는 말도 있었다. 그녀만의 향기,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그녀만의 체취가 예쁘장한 글씨체 안에 살폿 녹아 있었다.
봄 속으로 같이 뛰어들자고, 찬란한 봄을 선사하고 싶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이대 앞 다방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왔는데 갑자기 내 생각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그 다방에 다시 들어섰고 엘튼 존의 투나잇을 들으며 편지를 쓰고 있다고, 그녀에게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애정의 밀물이 부드럽게 밀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글 전체의 맥락은 여전히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여운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녀 앞에서 절망하게 하던 연갈색의 심연이었다. 나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그 심연과 부딪혀 그녀와 있을 때면 온몸을 저리게 하던 깊이 모를 아득함이 눈 앞에 출렁이는 듯했다. 그러나 편지가 온 것이었다. 그녀로부터. 내게 단 한 줄의 편지도 보내지 않던 사랑하는 그녀로부터 무려 세 장이나 되는 편지가 날라온 것이었다.
우주를 얻은 듯한 감격과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나는 그녀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경사 아래로 몸을 굴렸다. 온몸에서 웃음의 햇살이 터져나오며 데굴데굴 굴렀다. 멈춰진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풀 한 점 털지 않고 다시 위로 올라가 환희의 포효 속에 몸을 굴렸다. 몇 번이고 그랬다.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기쁨의 충일과 감격, 설레임의 폭발만이 내 자그마한 광기의 내부에 파도치고 있었다.
그렇게 눈부신 재출발을 하긴 했지만 그 날 이후 몇 차례 황홀한 만남을 가진 다음으로 만남이 지속되진 못하고 있었다. 온통 뒤숭숭하고 살벌한 학내 분위기, 갑작스런 휴교로 인해 서울을 떠나 청주로 내려가는 일, 그리고 그녀도 자기 딴엔 무슨 일이 있는지 서로 뜸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해 가을, 추석 때였다. 성묘를 위해 청주에 내려가 식구들과 함께 진천에 있는 산에 오르고 있었다. 진천 할아버지도 시골에 있다가 우리와 합류했다. 성묘가 끝나고 내려오는 길에 진천 할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네 증조부는 사상가여, 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