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1775년 2월 5일, 세손 이산 ‘존현각 일기’ 中
배우 현빈의 첫 사극이자 제대 후 복귀작, 게다가 드라마 ‘다모’(2003), ‘베토벤 바이러스’(2008), ‘더킹 투하츠’(2012) 등의 작품을 연이어 성공하며 연출의 귀재로 정평 난 이재규 감독의 스크린 데뷔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 ‘역린’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영화는 1777년 7월 28일, 자객이 정조의 침전인 존현각까지 침투했던 정유역변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정조 즉위 1년,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아야 하는 자, 죽여야 하는 자, 살려야 하는 자들의 엇갈린 운명과 역사 속에 감춰졌던 숨 막히는 24시간을 고스란히 그려냈다.
첫선을 보인 ‘역린’에서 가장 돋보인 건 익숙한 소재를 새롭게 다뤘다는 점이다. 이 감독은 정조 캐릭터를 그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정의로운 군주에 가두지 않았다. 대신 감정선을 따라가는 쪽을 택했다.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정조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면서 역사적 사건을 읽어 내려갔다는 점은 확실히 흥미롭다.
그렇다고 이 감독이 정조의 복잡한 내면만 계속 파고든 건 아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여의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정조의 심리에만 몰입하지 않고 균형을 잡은 덕에 답답한 느낌이 없다. 사극 특유의 대사 톤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점도 인상적인 지점이다.
영화를 보기 전 들었던 가장 큰 의문, ‘현빈이 복귀작으로 원톱 작품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서 지난 2일 열렸던 제작보고회에서 “다른 역할도 모두 탐날 만큼 매력적이었다”던 현빈의 말처럼 영화 속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매력 있었다.
하지만 이는 되레 단점으로도 작용했다. 너무 많은 캐릭터와 이야기가 펼쳐지다 보니 어디에도 방점이 찍히지 않았다. 캐릭터의 힘이 부족한 셈이다. 더군다나 인물 하나하나에 너무 공을 들인 탓에 극 초반에는 다소 지루한 감마저 준다. 강렬한 볼거리가 가득함에도 전개 속도가 빠르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차라리 영화보다 이야기를 풀어갈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드라마였다면 캐릭터들의 매력이 더 살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복잡한 전개로 다소 덜컹거렸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가면서 다시 힘을 얻는다. 상황이 긴박해지기도 했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극에 달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특히 오랜만에 돌아온 현빈의 연기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울 만하다. 그의 섬세한 내면 연기는 정조의 고민과 삶을 담아내며 정조의 지난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백 마디 말보다 많은 것을 전달한 눈물 연기 역시 나무할 데 없다. 현빈이 사극 배우로도 손색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다른 배우들의 호연도 빛을 발한다. 왕의 서고를 관리하는 상책 역의 정재영과 정조를 암살해야 하는 조선 제일의 살수 역의 조정석의 연기는 물론, 살수를 길러내는 비밀 살막의 주인 광백 역의 조재현, 아들 정조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혜경궁 홍씨 역의 김성령, 궁 최고의 야심가 정순왕후 역의 한지민, 역모를 밝히기 위해 힘쓰는 금위영 대장 홍국영 역의 박성웅, 비밀을 품고 궁에 들어온 세답방 나인 월혜 역의 정은채까지. 누구 하나 엇박자 내는 이 없이 극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극 말미 “작은 일도 무시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한다”로 시작하는 현빈의 내레이션과 함께 직접 어린 백성을 구하러 가는 정조의 모습은 현 사회와 묘하게 교차된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해석의 여지가 자연스레 다른 쪽으로 열리며 영화는 다양한 생각 거리를 던진다. 4월3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