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다. 이 새끼야. 산에 죽으러 가는 놈한테 뭐 이렇게 떠들어!”
어른에게 한 최초의 욕이었다. 막되어 가는 사람 흉내를 냈다. 어색했다. 손에 집히는 대로 지폐를 던져주었다.
새벽산. 하늘은 어슴프레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여름이면 우리 가족이 배낭과 돗자리를 메고 놀러와 물장난 치며 오이와 사과를 깎아 먹던 세검정. 지금은 나 혼자다. 가파른 산길을 뛰다시피 오른다.
마른 풀과 가시덤불이 정강이와 허벅지를 감아죄고, 휘휘 젓는 손등이 가시에 긁혀 피가 듬성듬성 맺힌다. 높은 바위에 올라서니 숙취가 올라 몸이 거꾸러질 것 같다. 머리가 혼란하고 다리가 휘청거리며 숨이 가쁘다. 토할 것 같다.
하지만 멈추기 싫었다. 가파르게 달리고 달리다가 바위 밑으로 구르거나 절벽 아래 떨어져 죽고 싶었다. 고의로 죽을 용기는 없으니 우연히 죽을 상황에 처하도록 내 몸을 혹사시켰다. 수풀을 스치는 바람보다 거칠게 숨소리가 학학거렸다. 바지는 흙먼지에 뒤덮였고 하얀 운동화가 새까매졌다. 손등이 가시에 긁혀 나갔다. 아랑곳하지 않고 가시덤불 속을 계속 휘저었다.
분이 쌓여 한숨의 강을 이루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가슴속 울분을 끌어모아 ‘야아’ 고함을 지르며 내달렸다. 메아리가 돌아오면 곧바로 되받아치며 목 놓아 울부짖었다. 돌변한 아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난밤의 악몽이 돌팔매질을 하며 쳐들어왔다. 꿈속에 포근히 잠겨있을 아이들 얼굴이 눈물 속에 아른거렸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아내가 왜 그랬을까. 심장 잃은 늑대처럼 가파른 산 속을 내달렸다. 자꾸 눈물이 났다. 닦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무너질듯 뛰어올라 비봉 꼭대기에 오르자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몸에서 울음이 솟기 시작했다. 오죽 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내가 아내를 학대했나? 내가 비겁한 놈이라고? 그 놈이 밉지는 않았다. 그가 내 심장에 꽂은 두 촉의 화살이 굳은 살에 예리한 구멍을 내 그곳에서 하수같은 눈물이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문득 아내가 걱정되어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오래 묵은 누런 노폐물들을 한꺼번에 다 쏟아내서인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막 문을 연 새벽의 꽃집에서 장미 한 송이를 샀다. 이 이른 아침에 꽃을 산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아파트 문을 열어 꽃을 건네려는 순간, 아내는 핸드폰을 받고 있었다. 그 남자인듯 했다.
“웃으며 주려 했는데, 웃음이 안나온다.”
미소를 거두며 꽃을 건넸다. 아내도 웃음기 없는 얼굴로 받았다. 건조한 아침 식사. 식사후 차를 몰아 인근 공원으로 향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단풍잎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모든 것을 얘기해 달라고 했다. 바람이 옷자락 속으로 사납게 파고들었다. 아내는 그간의 일을 간결하게, 아주 간결하게만 이야기해 주었다. 쥐기 싫은 것을 쥐어야 하는 고뇌와 놓아버리고 싶은 욕망, 놓기 싫은 것을 놓아야 하는 번민과 쥐고 싶은 애착 사이에 아내도 어렵게 견디고 있었다.
나는 따지듯이 물을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나 내게 이 싸움은 각자 견뎌내야 할 지독한 전쟁이다. 차라리 가난이나 질병이 대상이라면, 우리가 이를 악물고 함께 헤쳐 나가거나 마음을 비우고 순응하면 될, 투명한 성질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우리 둘만의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만도 아니다. 어떤 파란을 일으키며 달려들지 모를 복잡 미묘한 외부변수로서의 그가 있고, 우리 부부도 깊은 상처로 분열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정원이고 낙원이어야 할 가정이 이렇게 쉽게 무너져서는 안된다. 최소한 그것만은 아내와 내가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허무의 바다에 빠질 만큼 아내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내는 안과 의사인 그를 세미나 끝나는 시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며 성모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차를 몰아 병원 입구에 나를 내려주었다. 주차한 후 병원 안으로 들어서는 아내를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턱대고 걸었다.
테헤란로의 찻집. 창유리 밖으로 우리가 성공의 꿈을 키우며 다운라인들과 함께 사무실을 낸 빌딩이 보인다. 테헤란로. 무수한 욕망들이 충돌하고 결합하고 부서지는 거리. 금융과, 벤처와, 네트워크 마케팅의 메카. 그와 더불어 그 화려함의 허전한 이면을 채우고 적셔주기 위한 단란주점, 모텔, 룸싸롱, 노래방, 러브호텔....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이 먼 나라의 것처럼 낯설고 서먹서먹하다. 조금 전에 산 노트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