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와 앉아”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소곳이 서있던 아내가 걸어와 앉았다.
“현주야, 그 보라색 치마 멋진데......일어났다가 다시 앉아봐”
그는 자기 애인이나 아내 다루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내는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머리가 핑 돌았다.
“똑바로 들어. 내 마지막 질문이야. 이 남자 사랑해?”
내가 던진 물음에 내가 섬뜩했다. 나자신도 곧장 막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분위기 속에 얽힌 실마리를 풀어가고 싶었다. 자칫 마지막이 되어버릴 이 결연한 말 이전의 많은 이야기들.
둘 사이에 불 붙을 수밖에 없었을 필연적인 열정과 고뇌. 나로선 알 수 없는 의혹의 저 안쪽. 미처 식을 겨를도 없이 한이 되어버리고 말 듯한 아내에 대한 사무침과 고통. 속이 타들어갈 듯한 공허. 이대로 소멸되어버리고 싶은....아니, 이런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소통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더라도, 좀더 정적 속의 여운을 끌면서 이 낯선 시간 속에 잠겨가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와는 아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볼펜 하나 집어들고 딜레마를 들먹거리며 아내의 마음 전체를 읽어낸 듯한 오만 외에 내가 무슨 노력을 했던가. 아내는 피로에 지쳐 쓰러질듯 안기며 온몸의 호소를 보냈는데, 나는 아랑곳없이 서랍 속의 케케묵은 상처 더미만 보여주며 아내에게 도리어 오물을 씌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속 깊은 울림은, 이미 화살이 되어 날아가 버린 말의 뒤켠에 먹먹하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나의 말은 내면의 활시위에 닿자마자 떠나버린 것이다.
“이 남자 사랑해?”라는 단도직입적 물음에 아내가 “응”이라고 대답하거나 고개를 조금이라도 끄덕일 경우, 나는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었다. 가속으로 달리는 트럭에 치인 새처럼, 나는 운명을 무방비의 새벽도로에 내던지고 있었다.
아내의 반응이 내게 불리할 경우 나 스스로 치욕스럽지 않을 행동의 선택들은 너무도 끔찍한 것들이었다.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배신과 절망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자존심의 펜촉 끝까지 다다른 내 정신은 파멸만이 유일하게 남은 길이라는 촉박한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랑의 불온한 승자들 앞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추해질 뿐이므로 뭔가 결연한 액션을 취해야 한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나는 돌연하고 핵심적인 말들을 통해 그를 제압해 왔다. 그러니 내가 패자로 마감될 순간에도 그만큼의 분명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저 십오 층 베란다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일 것같은 강박이 무서울 따름이었다.
아내는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조금 끄덕이면 되는 그 쉬운 몸짓마저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부동의 몸부림. 죽음 같은 정적 속에 숨 조이도록 아픈 균형......아내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의 극단적인 행동만은 막아보자는 차가운 배려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내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냉소에 부치는 깊은 곳의 고독이, 벙어리 속처럼 아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솔직한 그녀의 성격 그대로 사랑의 딜레마라는 정중앙에서 좌우 한 치도 운신 못할 완전 무중력에 빠져버렸는지도. 그 불모의 무중력에 정신을 모두 빼앗겨 앉으라면 앉고, 다시 일어섰다가 앉으라면 그렇게 하는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는지도.
사랑과 죽음은 얼마나 정밀한 각(角)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사랑과 배신이 맞물린 삼각관계, 한쪽으로의 사랑이 다른 쪽에 대한 배신으로 직결되는 긴장 공간 속에서, 연인의 미세한 파동은 공간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아내의 부동은 나를 죽음에로의 발작에서 지켰고, 그를 사랑의 확신에서 멈칫거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