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이현경 기자]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미천한 집안이나 변변치 못한 부모에게서 훌륭한 인물이 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최근 개천의 용을 볼 기회가 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가 개천의 용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 높아져 버린 사회 계층의 벽이 개인의 순수함 마저 위협하고 있다. 순수하지만은 않은 영화 '퓨어'가 이를 제시한다.
빈민층 소녀 카타리나(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모차르트 음악을 들은 후부터 예술과 문학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하며 콘서트홀을 찾는다. 마에스트로 아담(사뮤엘 프뢸러)으로부터 에켈뢰프의 시, 키에르케고르의 서적 등과 같은 고급문화를 접하게 된 그는 클래식 음악을 소개해주는 정규직 자리를 소망하지만, 용기와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단단한벽에 부딪히고 만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은 사회가 정해놓은 계급에 따라 정해진다는 설정하에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아담과 카타리나를 통해 교육 수준이 높고 자본이 풍부한 상류 계층, 그리고 이와 반대로 문화적 수준이 낮고 빈곤한 집단인 하위계층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알코올 중독 엄마 아래서 자란 카타리나는 폭력적인 성향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다닌다. 남자친구의 옷을 빌린듯한 오버사이즈의 후줄근한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제대로 묶지도 않은 머리는 한눈에 봐도 클래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집단에 속할 것 같다. 또한 카타리나의 친구들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켈리 클락슨의 팝 음악, 스눕독의 힙합을 즐겨듣는다. 반면 상류층 아담은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곳에서 군나르 에켈뢰프의 시, 키에르케고르의 서적 등을 접하며 고급문화를 즐기는 데 익숙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기득권을 남용해 카타리나를 노리개로 이용한다. 이 같은 영화 속 장면들은 사회적 신분과 계층에 따라 세습되는 것은 자본만이 아니라 문화 취향까지 포함됨을 시사하고 있다.
영화는 클래식 음악을 통해 '보여주기'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로 이어간다. 음악과 배우의 연기력이 더해지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할 수 있다. 카타리나 역의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불안한 감정을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에 집중했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목표에 다다름에 이른 희망, 내 것이 아님을 깨닫는 절망의 심리 변화가 압권이다. 클래식 공연을 처음 보러 간 카타리나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모차르트 '레퀴엠', 그 외에도 콘서트 홀 복도에서 카타리나가 듣게 된 바흐의 '아리아'는 현악 3중주로 편곡돼 카나리나의 눈물을 글썽이게 할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연주된다.
'보여주기'와 '들려주기'를 통해 영화 '퓨어'는 쇼펜하우어, 부르디외, 키에르케고르, 에켈뢰프 등 수많은 사상가와 문학작품이 녹아있는 감독의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순수함'은 가진 자들에겐 사치이며, 없는 자들에겐 흠이 아닐까?
영화 '퓨어'는 가볍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88만세대, 배경도 없고 돈도 없는 대한민국 소시민의 이야기와도 멀지 않다. 영화 '퓨어'에 대해 깊게 알고 싶은 팬들을 위한 정보 하나. 24일 오후 7시3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저자 강신주 철학자와 함께하는 '퓨어' GV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진행된다.
[뉴스핌 Newspim] 이현경 기자 (89hk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