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돈 50만원 없어 절망 떨다 1700만원 대출 힘입어 재기
- 이젠 월 700만원 어엿한 가장 "둘째 맛난 것 사줄때 행복"
- 하나희망재단 "재기의지만 봅니다"…저신용층 새 삶 인도
[뉴스핌=한기진 기자] 일주일 새 기승을 부리던 한파가 살짝 누그러진 21일 오후 2시에 열린 하나미소금융재단 출범식.
짧은 머리에 긴장한 듯한 표정의 사내가 자리에 앉았다.
홍상연(39)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옆자리에 앉은 박진 국회의원 등 내로라 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그때는 단돈 50만원도 없었어요. 그런데 대출을 해주겠다니 제 부인도 믿지 못하겠다고 했어요.”
"건설 일용직으로는 삶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내 기술을 살릴 수 있는 가게를 차리고 싶은 마음 간절했어요."
그래서 창업자금이 필요했지만 은행 문턱은 터무니 없이 높았다.
여러 장의 카드로 빚을 돌려막는 것에도 이미 한계에 직면했던 그였다.
하지만 솟아날 구멍이 찾아왔다. 하나은행이 출연한 하나희망재단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홍씨는 갖고 있던 900만원을 더해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전업사를 차렸다.
‘은혜전기.’ 전등, 콘센트 등 전기자재를 싣고 각종 건설공사장으로 그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 노숙인어었던 그, 재기에 몸부림치다
홍씨는 한때 길거리를 떠돌던 노숙인이었다.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갖고 있던 돈 모두를 날렸다.
빚으로 버티는 데도 한계에 다다르자, 거리로 나서야 했다.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우고 공공화장실에서 세수하고 공원에서 잠을 잤다.
그러던 중 지금의 부인을 만나, 살림을 차렸다.
“힘들다고 해도 만나게 되더라.”
이제 가장이었다. “애기도 태어나고 건설현장을 다니며 돈벌이에 나섰어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의 일상의 연속, 그랬어요.”
그런데 생활은 쪼그라들기만 했다.
“가족을 위해 뭔가 해야 했지만, 그때는 50만원도 없었어요.”
♦ 하나희망재단에서 희망을 찾다
지난 6월 9일 홍씨는 전업사 간판을 내걸었다. ‘은혜전기.’
공고와 군대에서 익혔던 전기기술을 살려, 자기 가계를 연 것이다.
“가계를 열고 싶어도 대출이 되지 않았는데, 1700만원씩이나 빌려줄지는 몰랐어요.”
신용도 담보도 없는 게 그였다.
작년 11월 첫 대출을 시작한 하나희망재단이 그에게 자립지원금으로 내줬다.
연리 4.5%에 거치 1년으로 시중은행 대출금리보다도 싸다.
지금까지 180명이 빌려갔다. ‘재기 의지와 기술만을 믿었다’는 게 희망재단측 이야기다.
최근 저소득층의 재활을 돕겠다며 설립된 하나미소금융의 전신이 희망재단이다.
홍씨는 월 700만원 소득에 순수익만 300~400만원은 된다고 했다.
홍씨는 목 멘 소리로 말했다.
“애가 둘이에요. 큰애는 세살 때 먹을 것을 사달라고 졸라도 사주질 못했어요. 돈이 너무 없었죠. 지금 둘째는 얼마든지 사줄 수 있어 너무나 기뻐요.”
- 이젠 월 700만원 어엿한 가장 "둘째 맛난 것 사줄때 행복"
- 하나희망재단 "재기의지만 봅니다"…저신용층 새 삶 인도
[뉴스핌=한기진 기자] 일주일 새 기승을 부리던 한파가 살짝 누그러진 21일 오후 2시에 열린 하나미소금융재단 출범식.
짧은 머리에 긴장한 듯한 표정의 사내가 자리에 앉았다.
홍상연(39)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옆자리에 앉은 박진 국회의원 등 내로라 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그때는 단돈 50만원도 없었어요. 그런데 대출을 해주겠다니 제 부인도 믿지 못하겠다고 했어요.”
"건설 일용직으로는 삶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내 기술을 살릴 수 있는 가게를 차리고 싶은 마음 간절했어요."
그래서 창업자금이 필요했지만 은행 문턱은 터무니 없이 높았다.
여러 장의 카드로 빚을 돌려막는 것에도 이미 한계에 직면했던 그였다.
하지만 솟아날 구멍이 찾아왔다. 하나은행이 출연한 하나희망재단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홍씨는 갖고 있던 900만원을 더해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전업사를 차렸다.
‘은혜전기.’ 전등, 콘센트 등 전기자재를 싣고 각종 건설공사장으로 그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 노숙인어었던 그, 재기에 몸부림치다
홍씨는 한때 길거리를 떠돌던 노숙인이었다.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갖고 있던 돈 모두를 날렸다.
빚으로 버티는 데도 한계에 다다르자, 거리로 나서야 했다.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우고 공공화장실에서 세수하고 공원에서 잠을 잤다.
그러던 중 지금의 부인을 만나, 살림을 차렸다.
“힘들다고 해도 만나게 되더라.”
이제 가장이었다. “애기도 태어나고 건설현장을 다니며 돈벌이에 나섰어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의 일상의 연속, 그랬어요.”
그런데 생활은 쪼그라들기만 했다.
“가족을 위해 뭔가 해야 했지만, 그때는 50만원도 없었어요.”
♦ 하나희망재단에서 희망을 찾다
지난 6월 9일 홍씨는 전업사 간판을 내걸었다. ‘은혜전기.’
공고와 군대에서 익혔던 전기기술을 살려, 자기 가계를 연 것이다.
“가계를 열고 싶어도 대출이 되지 않았는데, 1700만원씩이나 빌려줄지는 몰랐어요.”
신용도 담보도 없는 게 그였다.
작년 11월 첫 대출을 시작한 하나희망재단이 그에게 자립지원금으로 내줬다.
연리 4.5%에 거치 1년으로 시중은행 대출금리보다도 싸다.
지금까지 180명이 빌려갔다. ‘재기 의지와 기술만을 믿었다’는 게 희망재단측 이야기다.
최근 저소득층의 재활을 돕겠다며 설립된 하나미소금융의 전신이 희망재단이다.
홍씨는 월 700만원 소득에 순수익만 300~400만원은 된다고 했다.
홍씨는 목 멘 소리로 말했다.
“애가 둘이에요. 큰애는 세살 때 먹을 것을 사달라고 졸라도 사주질 못했어요. 돈이 너무 없었죠. 지금 둘째는 얼마든지 사줄 수 있어 너무나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