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홍승훈기자]
"36년동안 지속된 닭살 커플의 우정이 인포뱅크의 성장동력이다"
인포뱅크는 박태형 사장과 장준호 사장이 공동대표로 끌어가고 있다. 57년 닭띠 친구인 두 CEO는 인포뱅크를 공동 설립해 13년간 함께해 왔다. 인포뱅크(INFOBANK)라는 회사명도 뱅커출신인 박태형 사장의 'BANK'와 장준호 사장의 주업무였던 정보기술의 'Infomation'을 합친 것이다.
![](http://img.newspim.com/img/071119-20.jpg)
경영 총괄을 맡고 있는 박 사장은 전직 외국계 뱅커로 뱅커트러스트 한국지점 수석부지점장 출신이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서 MBA를 취득, 소위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인물. 국내 금융계를 좌지우지했던 국민은행 강정원 은행장, 도이치증권 한국지점 임기영 부회장, 전 우리금융 회장이었던 황영기씨 등이 뱅커트러스트에서 활약할 당시 차례로 그들을 사수로 뒀던 잘 나가던 뱅커출신.
그러던 그가 뱅커를 접고, 과감하게 코스닥에 뛰어들었다.
박 사장은 "긴 인생, 평생을 돈 생각만 하다가 마감하기에 억울할 것 같았다"며 "돈 생각 안하고 매진할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이 필요했다"고 코스닥에 입성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은행 근무 당시 외국계 기업들이 한국내 투자할 만한 기업이나 아이템을 조사하기 위해 시장자료와 업계 동향 등에 대해 새벽까지 리서치를 했던 것이 현재의 인포뱅크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때 힘이 된 친구가 장준호 공동대표. 재무와 경영에 자신있었던 박 사장에게 단점인 기술개발을 보완해준 친구가 바로 장 사장이다.
그는 박 사장이 고교, 대학에 이어 군대 동기이면서 힘든 유학생활을 함께 견딘 친구이자 동지다. 당시 삼성SDS에서 벤처 비즈니스팀장으로 있던 장 사장은 박 사장의 첫 사업 제안에 거절했다.
하지만 박 사장은 5개월여를 쫒아다녔다. 장 사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그만두는게 어디 쉽나요. 오랜 고민 끝에 사업을 통해 역량과 꿈을 펼칠 결심이 생겼어요. 지금은 나를 설득해 준 박 사장에게 오히려 고맙죠"라고 귀띔했다.
이렇게 힘 모아 세운 인포뱅크는 95년 회사설립 후 유수의 대기업들을 제치고 서울시 버스안내시스템 시범사업자로 선정,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본 사업에 들어갈 경우 300억원 이상의 매출효과가 예상되는 당시로선 대박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IMF가 휘몰아쳤다. 서울시 프로젝트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
하지만 그들은 버스안내시스템 구축 당시 적용된 통신기술을 바탕으로 '무선데이터 통신망'이라는 돌파구를 찾아 SMS를 기획하며 반전을 꾀했다. "그때의 어려움이 설립후 12년이 지난 현재 인포뱅크 성공의 주춧돌이었습니다. 당시 동고동락한 임직원이 회사의 큰 자산이죠"라고 박 사장은 당시를 회고했다.
12년간 그들이 한방에서 동고동락하며 국내 1위의 메시징서비스 전문기업으로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전 직장에서 받던 고액의 연봉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에도 불구하고, 벤처 1세대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새로움에 대한 도전과 성공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박 사장과 불교신자인 장 사장이지만 그들에게 종교는 그저 종교일 뿐이다.
박 사장은 "자주 토닥거리지만 오랜 지기다보니 이제 눈빛만 봐도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끊임없이 언쟁을 하지만 결국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절충안을 찾는 노하우도 생겼다"고 전했다.
피보다 진한 우정,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에서 다른 기업과는 한차원 다른 '프렌드십 경영마인드'이 엿보였다.
"36년동안 지속된 닭살 커플의 우정이 인포뱅크의 성장동력이다"
인포뱅크는 박태형 사장과 장준호 사장이 공동대표로 끌어가고 있다. 57년 닭띠 친구인 두 CEO는 인포뱅크를 공동 설립해 13년간 함께해 왔다. 인포뱅크(INFOBANK)라는 회사명도 뱅커출신인 박태형 사장의 'BANK'와 장준호 사장의 주업무였던 정보기술의 'Infomation'을 합친 것이다.
![](http://img.newspim.com/img/071119-20.jpg)
경영 총괄을 맡고 있는 박 사장은 전직 외국계 뱅커로 뱅커트러스트 한국지점 수석부지점장 출신이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서 MBA를 취득, 소위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인물. 국내 금융계를 좌지우지했던 국민은행 강정원 은행장, 도이치증권 한국지점 임기영 부회장, 전 우리금융 회장이었던 황영기씨 등이 뱅커트러스트에서 활약할 당시 차례로 그들을 사수로 뒀던 잘 나가던 뱅커출신.
그러던 그가 뱅커를 접고, 과감하게 코스닥에 뛰어들었다.
박 사장은 "긴 인생, 평생을 돈 생각만 하다가 마감하기에 억울할 것 같았다"며 "돈 생각 안하고 매진할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이 필요했다"고 코스닥에 입성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은행 근무 당시 외국계 기업들이 한국내 투자할 만한 기업이나 아이템을 조사하기 위해 시장자료와 업계 동향 등에 대해 새벽까지 리서치를 했던 것이 현재의 인포뱅크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때 힘이 된 친구가 장준호 공동대표. 재무와 경영에 자신있었던 박 사장에게 단점인 기술개발을 보완해준 친구가 바로 장 사장이다.
그는 박 사장이 고교, 대학에 이어 군대 동기이면서 힘든 유학생활을 함께 견딘 친구이자 동지다. 당시 삼성SDS에서 벤처 비즈니스팀장으로 있던 장 사장은 박 사장의 첫 사업 제안에 거절했다.
하지만 박 사장은 5개월여를 쫒아다녔다. 장 사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그만두는게 어디 쉽나요. 오랜 고민 끝에 사업을 통해 역량과 꿈을 펼칠 결심이 생겼어요. 지금은 나를 설득해 준 박 사장에게 오히려 고맙죠"라고 귀띔했다.
이렇게 힘 모아 세운 인포뱅크는 95년 회사설립 후 유수의 대기업들을 제치고 서울시 버스안내시스템 시범사업자로 선정,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본 사업에 들어갈 경우 300억원 이상의 매출효과가 예상되는 당시로선 대박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IMF가 휘몰아쳤다. 서울시 프로젝트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
하지만 그들은 버스안내시스템 구축 당시 적용된 통신기술을 바탕으로 '무선데이터 통신망'이라는 돌파구를 찾아 SMS를 기획하며 반전을 꾀했다. "그때의 어려움이 설립후 12년이 지난 현재 인포뱅크 성공의 주춧돌이었습니다. 당시 동고동락한 임직원이 회사의 큰 자산이죠"라고 박 사장은 당시를 회고했다.
12년간 그들이 한방에서 동고동락하며 국내 1위의 메시징서비스 전문기업으로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전 직장에서 받던 고액의 연봉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에도 불구하고, 벤처 1세대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새로움에 대한 도전과 성공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박 사장과 불교신자인 장 사장이지만 그들에게 종교는 그저 종교일 뿐이다.
박 사장은 "자주 토닥거리지만 오랜 지기다보니 이제 눈빛만 봐도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끊임없이 언쟁을 하지만 결국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절충안을 찾는 노하우도 생겼다"고 전했다.
피보다 진한 우정,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에서 다른 기업과는 한차원 다른 '프렌드십 경영마인드'이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