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시장에 당국의 개입 경계감이 다시 커지고 있다.
29일 100엔/원 매매기준율은 전날보다 1.20원 떨어져 763.77원에 고시됐다.
당국의 대규모 개입이 단행된 지난 17일 기준율(765.34원)보다 1.57원 더 떨어진 수준.
당국이 엔/원 환율을 개입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만큼 실물 개입 가능성은 매우 커진 상태다.
그러나 지난 17~18일 이틀간 당국이 20억달러 넘게 달러를 샀음에도 환율은 일주일만에 다시 원상복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에 지난 번 개입 당시보다 당국의 입지가 더욱 좁아진 분위기다.
우선 개입 한도 부분.
그 동안 당국은 ‘개입 한도는 무한대’라고 누누이 강조해 왔지만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얘기이고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 2003년 당국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동원해 NDF 시장에 개입한 이후 당국의 시장개입은 국회로부터 강한 견제를 받고 있다.
실제 기획예산처는 국가재정운용계획상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발행 규모를 2006년 11조원, 올해 10조원, 내년 8조원으로 점차 줄여나가도록 잡고 있다.
물론 올해 11조원이 책정되는 등 내년에도 원 계획보다 한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지만 크게 늘어나긴 어려운 구조다. 운용계획 대비 30% 이상 변동이 생길 경우 국회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
내년도 외평기금 한도는 재경부가 올 6월말까지 요구안을 예산처에 제출하면 조율을 거쳐 정부안을 확정, 10월 초에 국회로 넘기게 돼 있다.
한은이 통안채를 마구잡이로 발행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채권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자 부담이 어마어마할 뿐더러 한은은 3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해 내부 유보금이 고갈 직전이다.
(이 기사는 29일 오후 2시 1분 유료회원들께 앞서 송고된 바 있습니다.)
또 하나 당국이 ‘개입의 딜레마’에 빠진 것은 외환시장 규모가 과거처럼 작지 않기 때문이다.
외환시장 은행간 거래량이 하루 30억달러 안팎을 기록하던 때야 몇 십원 올리기가 수월했지만 지금은 거래량 100억달러를 돌파한 상태여서 20억달러를 퍼부어도 10원도 채 올리기 어려워졌다.
당국은 이를 ‘젖떼기 과정’으로 표현한다.
시장 규모가 작으면 정부가 컨트롤하기 수월하지만 규모가 커지면 개입 효과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뉴욕이나 런던처럼 시장이 완전히 커지면 시장 수급으로 상충돼 개입이 불필요하겠지만 지금 달러/원 시장은 완전경쟁 시장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 정도 수준이어서 시장 수급으로 완전히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여론도 당국의 시장개입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환율이 떨어져도 수출이 호조세를 지속하는 등 과거보다 영향력이 떨어졌다는 것. 명분도 실리도 없다며 일부 언론들이 다시 ‘개입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분위기다.
수출로 먹고 살기 때문에 수출경쟁력이 약화되면 국내 경제가 나빠지기 때문에 환율하락은 좋지 않다는 고정관념이 잘 통하지 않고 있다.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수입 소비재나 자본재 가격이 싸졌고 값싼 중국산도 품질이 나아지면서 국내 물가는 안정되고 소비 여력이 생겨 그나마 내수 부진에서 서민들이 버틸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더욱이 국가가 위기 상황이 도래하지 않고 국내 통화인 원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게 다행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북한 미사일이 발사됐는데도 예전같았으면 급락했을 국내 증시는 견조했고, 급등했을 환율도 나름대로 일시적인 반응에 그쳤다.
과거 같으면 급등락으로 호들갑을 떨었을 금융시장이 의젓함을 보임에 따라 해외에서는 한국 거시경제의 안정성에 신뢰감이 대단히 커졌다는 점은 IMF 위기 이래 그토록 얻고 싶었던 가장 큰 성과인 것이다.
현재처럼 주가가 강세를 보이고 원화도 강세를 보이는 과정에서는 대부분 긍정적인 것들이고 부정적인 것이 중소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이지만,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국가 비상사태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원화 강세가 약세보다는 낫다는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지난 IMF 외환위기 시절 환율 폭등과 주가 폭락을 경험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국가 경제가 안정을 찾고 금융시스템이 안정화되고 경제주체들이 리스크 관리에 눈을 뜨는 과정이라면, 환율과 주가가 그 반대의 과정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무작정 환율 하락이 나쁘고 수출기업들한테 나쁘니 환율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집착증'에서 벗어나 시장과 대화하며 속도조절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재삼 인식할 시기라는 지적을 값있게 들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보면 환율이 떨어져도 당국이 개입에 쉽게 나서기 어려워 보인다.
내달 1일 한은은 5월 외환보유액을 발표한다. 지난번 개입 규모가 대략 어느정도 될지 알려지게 된다.
시장 일각의 추론이지만 지난번 개입규모가 20억~25억달러보다 훨씬 많으며 최대 50억달러까지 될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다.
최근의 시장 여건도 그렇기도 하고, 또 지난번 개입 규모가 예상보다 커지면 커질수록 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을 둘러싼 고민도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