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이란과 미국이 80일째 호르무즈 등 해상 병목을 둘러싼 ‘바닷길 전쟁’을 벌이며 세계 에너지와 물류를 흔들고 있다.
- 값싼 드론·기뢰·소형정으로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는 전술이 유가·운임·보험료와 식량·생필품 가격을 끌어올리는 ‘지정학적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 중동 원유·헬륨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반도체 공장까지 멈출 수 있는 구조라 공급망 다변화와 해상 수송로 안전 확보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서둘러야 한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전 세계 식탁과 공장에 지정학적 비용
중동 리스크 상수 생존 전략 다시 써야
[워싱턴=뉴스핌] 박정우 특파원 = 이란과 미국이 다시 총구를 겨눈 지 80일. 전장은 중동인데, 고통은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호르무즈라는 좁은 해협에서 울린 총성에 국제 질서와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사실 이란 전쟁은 미사일과 드론만의 싸움이 아니다. 해상의 전략적 통로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바닷길 싸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누가 해상 항로의 병목(critical maritime choke point)을 쥐고 흔들 수 있느냐의 싸움이다.
◆ 20%의 병목, 세계 경제의 수도꼭지가 잠기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 해상 수송의 약 20%가 지나가는 곳이다. 이란은 이곳을 정면으로 막지는 않는다. 대신, 드론을 날리고, 소형 고속정을 보내고, 기뢰를 뿌려 '사실상 봉쇄'에 가깝게 만든다.
미국 워싱턴의 국제 안보 전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이번 미국과 이란 간 대치를 "이제 더 이상 군사력의 충돌이 아니라, 정치적 인내와 협상 지렛대의 싸움"이라고 진단한다. 이어 "해상에서의 압박과 국내 정치적 제약, 나아가 강대국 간 경쟁이 얽힌 대결"이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포탄만 날아다니는 전쟁이 아니라 정치·경제·해협 레버리지가 한꺼번에 맞물린 싸움이라는 뜻이다.
CSIS는 또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함으로써 글로벌 에너지 흐름을 교란하려 했다"고 진단한다. 전세계 원유와 가스의 약 5분의 1이 이 좁은 해협을 지나지만 쉽게 우회할 수 없다. 우회로가 없으니, 작은 위협에도 유가와 운임이 크게 들썩인다.
실제 이란의 노림수 대로 호르무즈 해협을 오가는 선박 통행량은 급감했다. 하루 130척 오가던 선박이 한 자리 수까지 떨어졌다. 호르무즈를 지나는 상업 운송은 갈수록 이란의 조건에 좌우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 '가성비' 무기의 역설… 전 세계가 받는 청구서
이란이 쓰는 전술은 교과서처럼 단순하다. 드론, 해상 기뢰, 소형 고속정. CSIS는 이란이 가진 '전술 도구 세트(tool kit)'를 드론, 해상 기뢰, 소형 고속정으로 요약한다. 물론 이 값싼 무기들로 세계 최강 미국을 이길 수는 없다. 다만 미 해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위험과 불확실성을 부과하는 수준은 충분하다.
정공법으로는 미국에 맞설 수 없는 이란으로선, 전쟁을 꼭 이겨야 할 이유도 없다. 상대를 계속 불안하게 만들고, 비용을 계속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 된다. 이미 선박 보험료는 뛰고, 일부 선사는 아예 희망봉을 돌아간다. 거리와 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물류비용이 올라간다. 값싼 드론 몇 기로, 전 세계를 상대로 '운송비 청구서'를 다시 쓴 셈이다.
결국 이란발 해상 물류비 상승은 시차를 두고 각 가정의 생필품 가격표를 바꿔 놓는다. 중동 해협에 뿌려진 값싼 기뢰 하나가 지구 반대편 서민들이 마트에서 집어 드는 생필품 가격에 고스란히 전가되는 '지정학적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도미노처럼 닫히는 바닷길, '지정학적 동맥경화'의 확산
문제는 호르무즈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홍해–수에즈, 말라카 해협, 흑해, 모두 지구상에서 가장 좁고 가장 중요한 해상 길목들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4년 보고서에서 일찌감치 "홍해, 흑해, 파나마 운하의 핵심 해운로가 동시에 위협받고 있으며, 이는 물가와 식량·에너지 안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무장조직, 예멘 후티 반군은 2023년 이후 홍해와 아덴만에서 상선을 상대로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이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100척이 넘는 선박이 공격·나포됐고, 한국을 포함한 유럽 선사들까지 홍해 운항을 잇따라 접었다. 그 여파로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컨테이너선과 유조선 통과량은 정점 대비 30∼40%나 줄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래를 피해 선박들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가고 있다.
세계은행은 "홍해 위기가 중동 분쟁의 핵심 화약고로 부상했다"고 평가한다. 경제적 충격이 바다의 병목에서 터져나온다는 얘기다. 홍해는 이미 세계 교역의 '약한 고리'로 읽힌다.
보이는 길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호르무즈와 홍해 해저에는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상당량을 처리하는 광케이블이 지나간다. 물리적 봉쇄를 넘어 이 해저 네트워크가 물리적 타격이나 도청의 타깃이 될 경우, 물류 정체를 넘어 글로벌 금융망과 디지털 경제 자체가 '블랙아웃'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말라카 해협도 다르지 않다. 이곳은 세계 교역의 약 3분의 1과 세계 해상 석유의 4분의 1 이상이 통과하는 곳이다. 미 외교협회(CFR)에 따르면 핵심 해상 길목인 말라카 해협에 걸쳐 있는 국가는 세계경제에 이례적인 지렛대(레버리지)를 행사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라카를 쥔 국가는 세계 경제의 '수도꼭지'를 손에 쥔 셈이다.
아시아해적퇴치협정(ReCAAP)에 따르면, 지난해 아시아에서 발생한 해적·해상 무장강도 사건 132건 가운데 108건이 말라카·싱가포르 해협에서 일어났다. 19년 만의 최고치다. 아직 국가 간 전쟁은 아니지만, 값싼 소형선과 무장을 통한 '일상적인 교란'의 시대가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 러시아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주요 곡물 수출기지인 흑해 항구도 봉쇄와 점령을 반복하고 있다. 현재도 우크라이나의 흑해 항구들은 봉쇄되거나 점령돼, 식량 수출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UNCTAD는 "흑해 항구를 여는 것이 지금 세계의 굶주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호소한다. 우크라이나 곡창에서 수확한 곡물을 실은 배 한 척, 한 척의 출항이 아프리카와 중동의 식탁을 지탱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에너지, 식량은 물론 제조 물류를 잇는 국제 해상 길목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질이 되고 있다.

◆ 규범 대신 레버리지, '네트워크 무기화'의 시대
호르무즈, 홍해–수에즈, 말라카, 흑해에서 벌어지는 일은 서로 다른 분쟁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같다. 해상 병목을 쥔 쪽이 물류와 곡물, 에너지, 심지어 데이터 흐름까지 흔들면서, 길 하나가 곧 '지렛대'가 되는 시대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력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은 용인하지 않는다'는 전후 국제 규범은 우크라이나·이란 전쟁을 거치며 계속 시험대에 올랐다. 말은 규범이지만, 현장에서는 힘과 레버리지가 우선한다.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는 "핵심 경제 노드에 대한 정치적 권한을 가진 국가는 정보를 수집하거나 경제·정보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네트워크를 무기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호르무즈·말라카·홍해 같은 해상 길목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 호르무즈가 막히면 반도체 공장도 멈춘다
한국은 이 구조 변화의 '시험장'에 서 있다. CSIS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이번 이란 전쟁으로 "비전투국 가운데 한국만큼 큰 타격을 입은 나라는 없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그 대부분이 호르무즈를 통과한다.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헬륨도 60% 이상을 카타르에서 들여온다. 해협 하나가 막히면, 반도체 공장 라인까지 멈출 수 있는 구조다.
곧 회복되긴 했지만 이란전쟁 직후 원화 가치는 한 때 17년 만의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전쟁터는 중동인데, 충격파는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크게 울렸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기업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일부 대형 제조·해운 기업은 이미 항로 다변화, 재고 확충, 장기 운임 계약, 보험 확대에 나섰다. 여기다 중동·유럽행 물량 일부를 다른 루트로 돌리고, 물류 허브를 분산하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런 조정은 전부 비용이다. 재고를 늘리면 자금이 묶이고, 안전한 항로를 택하면 운송비가 올라간다. 당장 실적에는 부담이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IMF는 공급망 다변화로 장기적으로 국내총생산(GDP)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달리 말하면, '싸게, 한 곳에서만' 조달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기업 입장에선, 어느 정도의 비용까지 감수할지, 어디까지 리스크를 분산할지가 새 숙제가 됐다.

◆ 지정학적 리스크는 이제 상수
세계경제포럼, IMF,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와 주요 싱크탱크는 지정학 리스크와 공급망 불안은 더 이상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오래 가는 구조적 리스크라는 공통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란전쟁 80일'은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좁은 해협에서 발사된 드론과 미사일이, 전 세계의 운임표와 물가, 투자계획까지 동시에 흔들었다.
한국에게 이 전쟁은 더 이상 '남의 집 불'이 아니다. 정부도, 기업도, 이제는 '위기를 피할 수 있느냐'를 묻는 대신
'이런 위기를 상수로 깔고 어떻게 버틸 것인가'를 묻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지정학은 더 이상 뉴스 속 단어가 아니다. 한국인의 주유소, 장바구니, 주식계좌 속 숫자를 직접 바꾸는 생활 변수가 됐다.
이제 정부는 단순히 유가 보조금을 푸는 단기 처방을 넘어, 핵심 자원 비축 시설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해상 수송로 안전을 위한 '민·관·군 합동 호송 역량'을 상시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아울러 특정 해협에 의존하지 않는 '공급망 다변화 외교'를 국가 안보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
dczoomin@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