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과 공간으로 증명한 잔인한 계급 격차
[서울=뉴스핌] 정태이 기자 = 오는 11일 개봉하는 영화 '폭풍의 언덕'은 에머랄드 펜넬 감독의 과감한 가위질과 재해석으로 시작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원작 서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언쇼의 아들 '힌들리'의 부재다. 영화는 방대한 원작의 가지를 과감히 쳐내고 언쇼와 캐서린, 히스클리프, 그리고 넬리와 린턴가(家) 사람들에게 오롯이 집중하며 인물 간의 감정선을 더욱 밀도 있게 압축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언쇼를 괴팍함을 넘어선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하며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집시 소년 히스클리프를 거두어들인 것은 그였으나, 그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아이의 뺨을 때리거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학대를 일삼는다. 이토록 이율배반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죽은 오빠의 이름을 붙여주며 기묘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학대와 방임 속에 피어난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사랑을 넘어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로 귀결된다.
두 사람의 견고했던 세계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 건 린턴가의 등장부터다. 아버지의 노름으로 가세가 기울어가는 '폭풍의 언덕'과 달리, 풍요롭고 우아한 린턴가의 세계는 캐서린에게 새로운 동아줄처럼 다가온다. 결국 캐서린은 린턴가의 에드거와 결혼해 그 재력으로 히스클리프를 지원하겠다는 현실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선택을 꿈꾸게 된다.
담장에 걸쳐 있다가 다쳐 에드거의 보살핌을 받고 돌아온 캐서린의 모습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달라진 행색만큼이나 미묘하게 변해버린 공기 속에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서로에게 모진 말을 뱉어내며 생채기를 낸다. 캐서린은 내면 깊숙이 자리한 히스클리프를 향한 갈망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이 과정은 하녀 넬리에게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특히 넬리와 캐서린의 대화 씬은 이 영화의 백미라 할 만하다. 감독은 마치 죄를 고백하는 신도와 이를 듣는 신부처럼 두 사람을 배치했다. 여기서 넬리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그는 문 밖에서 히스클리프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마치 신의 대리인이라도 된 양 캐서린에게 에드거와의 결혼이 옳다는 답을 유도해낸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까지 천해진다"는 캐서린의 자조 섞인 한마디는 결국 히스클리프를 떠나게 만드는 방아쇠가 된다.

에드거와 결혼한 후 캐서린의 삶은 시각적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감독은 미장센을 통해 두 세계의 격차를 잔혹하리만치 선명하게 보여준다. 노름에 빠진 아버지 탓에 장작 하나 마음대로 땔 수 없던 언쇼가의 허름한 방은, 에드거의 저택에 이르러 따스한 벽난로와 은은한 조명으로 대체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대비는 의상에서 드러난다. 집안에서 행해진 도축으로 인해 가축의 피가 튀어 얼룩졌던 캐서린의 치마는 린턴가에 입성한 뒤 화려한 목걸이와 풍성한 실크 드레스로 뒤바뀐다. 이 극적인 시각적 변화는 그녀가 왜 그토록 에드거의 세계를 동경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얼마나 본능적인 생존의 문제였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후 부를 거머쥐고 돌아온 히스클리프와의 재회는 감정의 폭발을 불러온다. 특히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향해 내뱉는 대사는 두 사람의 파괴적인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네 가슴을 찢은 게 아니야. 네가 네 가슴을 찢은 거야. 네 가슴을 찢으면서 내 가슴까지 찢어놓은 거야."
이 처절한 절규와 함께 두 사람은 그동안 억눌러왔던 뜨거운 감정을 터뜨리며 서로를 탐닉한다. 가질 수 없기에 더욱 절절하고 닿을 수 없기에 더욱 파괴적인 그들의 사랑은 스크린을 압도한다.
이 파국을 감싸는 것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황량하고 축축한 질감이다. 어린 시절 서로가 유일한 세계였던 순간부터 엇갈린 운명 속에 서로를 갈망하는 장면까지, 화면을 채우는 거친 바람과 서늘한 미장센은 인물들의 비극적 정서를 완성하는 훌륭한 장치로 기능한다.
캐서린을 연기한 마고 로비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깊은 눈빛과 섬세한 동작 하나하나에 "진짜 캐서린이라면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설득력을 부여한다. 의상과 소품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그 아우라는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일등 공신이다.
다만 연출의 선택과 집중에 아쉬움이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강렬한 교수형 씬을 배치하며 시선을 끌지만 극의 흐름상 굳이 필요한 장치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taeyi427@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