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에 저장하는 '디지털 신분증'
영국, 1939~1952년 신분증 일시 도입 후 폐지
[런던=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영국 노동당 정부가 26일(현지 시간) 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국가 신분증 제도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가 확인·발급한 신분증명을 휴대전화 등으로 다운받아 사용하는 '디지털 신분증'으로 이 신분증이 없는 불법 해외 이민자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취지라고 했다.
![]() |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사진=로이터 뉴스핌] |
영국은 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 신분증 제도를 도입했고, 1952년 2월 폐지했다. 정부가 개인 사생활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반발이 커지자 당시 보수당 정부가 폐지했다.
이후 영국에서는 한국 주민등록증처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신분증은 없다. 대신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처럼 본인이 필요에 따라 발급받는 신분증만 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이날 캐나다·호주 등 전 세계 40여개 국가의 진보 성향 지도자와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한 '2025 세계 진보 행동 정상회의'에서 "영국 정부는 이번 의회의 임기(2029년 7월 9일까지) 내에 새 디지털 신분증 사용을 의무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타머 총리는 "디지털 신분증은 영국에 엄청난 기회가 될 것"이라며 "영국에서 불법으로 일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국경의 보안도 강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전한 국경과 통제된 이주는 합리적인 요구이며 (노동당) 정부는 이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자리를 찾고 돈을 버는 것은 영국에 불법적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주요 동인"이라며 "영국에 머물 권리가 없는 사람의 구직과 취업을 막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합법적 신분을 가진) 시민들은 신분 증명으로 주요 서비스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등 수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오래된 공공 서비스 청구서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영국 정부는 앞으로 3개월 동안 구체적 방안 마련 작업을 하고 내년 초에 법안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했다.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대책도 마련하기로 했다.
신분증에는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 또는 거주 상태, 사진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총리실은 개인이 신분증을 휴대하거나 제시하도록 요구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디지털 신분증은 영국에서 일할 권리를 증명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권에서는 반대와 반발 입장이 제기됐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극우성향의 포푤리즘 정당 영국개혁당(Reform UK)은 "이미 이민법을 어기고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법을 준수한다는 것을 우스꽝스럽다"며 "현금 지불로 번창하는 불법 노동 시장에서 디지털 신분증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지 의문"이라고 했다.
제1 야당인 보수당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고, 고용주들은 더 많은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회색 경제(grey economy)에서는 불법 노동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디지털 신분증은) 불법 이민자를 태운 배들을 멈추기 위한 해답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영국 시민들의 과반은 신분증 도입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기관 입소스(Ipsos)가 지난 7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7%가 국가 신분증 제도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