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앞서갔던 김인겸, '접기'라는 조형방식 차용
퐁피두센터 초대로 프랑스 체류하며 모색과 실험
무거운 양감서 해방된 사유의 조각들 우손갤러리에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리처드 세라, 도날드 저드 등 해외 조각가들 이름은 줄줄이 외우고, 그들 작업은 기억해도 한국 조각가들에겐 별반 눈길도, 애정도 주지않으려는 게 우리 풍토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꼭 기억해야 할 조각가들이 적지 않다. 특히 조각가 김인겸(1945~2018)은 작업의 성취에 비해 대중에 덜 알려진 작가다. 그를 재조명하는 작품전이 대구 우손갤러리에서 개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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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대구 우손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김인겸 작가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03.10 art29@newspim.com |
우손갤러리(대표 김은아)는 지난 3월6일 김인겸 작품전의 막을 올렸다. 오는 4월 19일까지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문화길 우손갤러리 대구에서 열리는 전시의 타이틀은 '조각된 종이, 접힌 조각'이다. 이번 전시는 김인겸 작가가 1996년 파리 퐁피두센터 초대로 프랑스에 정착하며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변화된 작업양상을 확실히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전시 타이틀은 김인겸 작업에 주목했던 프랑스 평론가 기 부아이에가 쓴 비평문에서 차용한 것이다.
김인겸은 조각에 '접기'라는 방식을 다각도로 실험하고 적용한 작가다. '종이를 접어 세우면 입체가 된다'는 생각을 과감히 작업에 대입시켜 그 어떤 작가와도 다른 일련의 작업들을 쏟아냈다. 전시는 1990년대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빈 공간' 시리즈와 'Space-less'시리즈가 주를 이루고 있다. 종이에서 시작한 김인겸의 탐색이 스르르 조각의 형식으로 발전하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평면 데생의 방식으로 실현되며 '조각과 데생의 언어가 상호 교차하고 치환하는 양식'을 오롯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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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우손갤러리가 개최한 김인겸 작품전에 출품된 2005년 작품. 'Emptiness'.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03.10 art29@newspim.com |
전시를 주최한 김은아 우손갤러리 대표는 "지난 2005년 김인겸 작가가 대구의 앞서가는 화랑이었던 시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진 이후 20년 만에 다시 대구에서 작가의 개인전을 열게 돼 감개무량하다"며 "작가는 깊은 모색과 성찰을 거쳐 조각을 매스(덩어리)로부터 자기 방식으로 해방시키며 시대를 앞서갔다"고 밝혔다.
이번 작품전에는 김인겸이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가하며 설치한 작품도 나왔다. 세계 정상의 현대미술제인 베니스비엔날레는 1895년 창설됐지만 한국은 100년이 지난 뒤인 1995년에야 국가관들이 주르르 늘어선 카스텔로공원 한켠에 국가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첫 국가관 전시는 미술평론가인 이일 커미셔너의 기획으로 곽훈, 김인겸, 윤형근, 전수천이 한국을 대표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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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김인겸 'Space-Less', 2016, acrylic ink on paper, 79x109 cm, [사진= 김산, 이미지 제공=우손갤러리] 2025.03.10 art29@newspim.com |
당시 김인겸은 4명이나 되는 작가가 각기 다른 작업을 선보이기 어려운 한국관 내부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으며, 전시관 내부의 원형 계단을 감싸는 독특한 설치작품 '프로젝트21-Natural Net'를 선보였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반투명 아크릴 재료와 물을 소재로 장소특정적인 설치미술을 구현한 것이다.
이 후 김인겸은 1996년 퐁피두센터 초청으로 파리로 건너갔고 그 곳에서 10여 년을 머무르며 작업했다. 이 시기는 작가에게 많은 변화와 탐색을 가능케 한 아주 중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파리로 건너간 이후 김인겸의 작업 세계는 크게 달라졌다. 이 후 '접힌 조각'시리즈가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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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김인겸 'Emptiness'. 2005. 코르텐 스틸, 234x62X53cm [사진=김산, 우손갤러리] 2025.03.10 art29@newspim.com |
김인겸은 원래 양감(mass)이 있는 조각을 하던 작가였다. 그에게 파리 생활은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다. 작업실도 협소했고 재료를 구하는 것도 아무래도 한국 보다 쉽지않았다. 그 때 그가 집중하게 된 것은 어디서든 쉽게 작업하고, 어떤 모습으로도 변화시킬 수 있는 '종이'였다.
"내가 말하는 이곳에서의 작품 활동이란, 곧 다른 사회에 적응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작품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작가에게 보다 큰 신축성과 유연성, 그리고 개별성을 요구하게 된다. (중략) 내 경우 이것은 우선 손쉬운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려운 것부터 배워온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한 체험이다. (중략) 요즘 나는 물감도 접고, 종이도 접고, 철판도 접는다. 그리고 공간을 만든다. 빈 공간을, 마음도 한쯤 접어놓고 텅 비어진 기분이다."(1997년 작가 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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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대구 우손갤러리 김인겸 개인전의 전시 전경. 2004년작 'Emptiness'와 평면작품이 내걸렸다. [사진=이영란 기자] 2025.03.10 art29@newspim.com |
이미 한국에서도 종이로 조각작업의 마케트(maquette, 작은 모형)를 만든 적이 있던 작가는 종이를 가져다가 접고 붙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형언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판화작업에 쓰는 밀대인 스퀴즈에 먹물을 묻혀 종이 위에 여러 차례 밀어냄으로써 투명하면서도 겹치는 방식으로 공간감이 만들어지는 평면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김인겸은 마침내 자신이 하고 싶은 조각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런 작가의 실험은 양감이 중심이 되는 전통적인 조각어법에서 벗어나 '면(面)'을 강조한 일련의 작업으로 발전했다. 2000년대 김인겸은 '빈 공간'(Emptiness)시리즈를 내보였고, 말년이는 '스페이스-리스'(Space-Less) 연작을 이어나갔다.
우손갤러리 전시에는 '접기'라는 조형 방식이 두드러지는 작품들로 짜여졌다. 2004년 작이자 대표작의 하나인 '빈 공간'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반원이나 렌즈 모양을 만들었지만, 작품 안쪽은 빛을 모두 흡수하는 블랙 미러로 마감돼 입체감이 사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판타지를 느낄 수 있다. 전시장 벽에는 종이를 접듯이 철판을 접은 조각들이 관객을 맞고 있다.
부드러운 물결처럼 둥근 형상의 대형 조각들 역시 기다란 종이를 접고 찢은 형태인 것이 특징이다. 조각의 새로운 변혁이자 변주인 셈이다. 이와함께 스퀴즈를 이용해 종이에 먹물이나 아크릴 물감을 여러 차례 밀어내 공간감을 만든 작업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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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생전의 김인겸 작가. [사진 제공=우손갤러리] 2025.03.10 art29@newspim.com |
김인겸의 딸로 이번 전시를 기획한 미술비평가 김재도 박사(홍익대학교 초빙교수)는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출품작과 1992년 문예진흥원미술관(현 아르코미술관) 전시작의 영상과 아카이브도 함께 소개해 아버지의 작가로서의 궤적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어 "면은 그 자체론 서 있을 수 없지만 '접기'라는 단순한 행위만 가해지면 설 수 있고 입체도 된다. 또 면을 둥글게 말거나 접고, 또 찢어서 다시 접거나 하면 입체가 되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면으로 입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곤 하셨다"며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조형의 세계는 번잡스러운 것이 아닌 텅 빈 가운데 충만함이 있는 그런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김인겸은 홍익대학교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1977년부터 한국현대조각회전에 꾸준히 참여했다. 1980년에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가나미술상, 2004년에는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했다. 1988년 첫 개인전 '묵시공간'을 시작으로 모두 15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1995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작품을 출품했다. 2017년에는 수원시립미술관 전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김인겸: 공간과 사유'를 개최했는데 이듬해인 2018년 타계해 그의 생애 마지막 개인전이 됐다.
art2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