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체제 전복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북한·러시아·중국의 독재자들과 같은 수법을 동원한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왜 이런 국가들과 정치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는가?"
지난 6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외교장관 공동 기자회견 도중 뉴욕타임스 기자가 던진 질문이다. 윤 대통령의 불법 계엄선포는 세계적 모범국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일거에 나락으로 처박은 자폭 행위다. 전 세계는 충격과 함께 '도대체 왜'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날 회견장에서 외국 기자들이 당연히 이 질문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질문이 나오고 국제사회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조태열 장관이 답변을 하지 않아 회견장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회견을 진행하던 외교부 대변인이 답변을 안 하시겠느냐고 묻자 조 장관은 그제야 "내게도 질문이 있었나"라며 질문을 다시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기자는 다시 같은 질문을 또박또박 되풀이 했다.
조 장관이 질문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답변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모른척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 그의 심경이 어땠을지 짐작은 간다. 어쨌든 조 장관은 긴장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매우 솔직하게 답을 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한국이 걸어온 민주주의 역사와 같은 특수한 한국적 상황을 살펴야 한다. 우리는 굉장히 빠르게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이룩한 모범적인 사회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도 미처 탐지하지 못했던 취약성을 안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 내재적인 요소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시일 내에는 어렵다. 끊임없이 정치권이 각성을 하고 더 완벽한 민주주의를 향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조 장관은 국회가 계엄을 즉각 해제시켰고, 한국은 합법적인 권한대행 체제을 유지하면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외교관의 화법'으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교적 수사' 대신 처절한 '자기 고백'을 택했다.
한국은 그동안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비민주적 요소를 안고 살아오다가 분열과 정치 갈등이 임계점에 도달하자 폭발해버렸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외신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아마도 지금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초현실적 상황'이 그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공소장에 '내란 수괴'로 적시된 대통령은 지지자들에게 끝까지 싸워달라는 선동 메시지를 보내고 경호병력 뒤로 숨었다. 집권 여당은 대거 한남동 관저 앞으로 몰려가 사법기관이 발부한 체포영장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법 집행을 가로막았다. 대통령을 체포하려는 경찰을 시민이 체포해 달라고 선동하며 내란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남동 관저 앞에서 탄핵반대·체포저지를 외치는 지지자 무리의 시위 현장을 관찰하며 들은 대화 내용은 충격적이다. 계엄을 유발한 '리짜이밍'의 배후에는 중공(중국)이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공을 멸망시키기 위해 대통령이 된 사람이므로 취임하자마자 부정선거를 밝혀내고 윤 대통령을 지지할 것이라는 인식이다. 지금 이들에게는 트럼프가 '메시아'다. 그가 취임하는 20일까지만 버티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다. 전형적인 유사종교 현상이다.
계엄이 국격을 땅에 처박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적 역량과 회복 탄력성을 믿었다. 그런데 이제보니 회복 탄력성은 민주주의만 갖고 있는게 아니라 내란도 갖고 있다. 일시적 반동으로 발생했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대담해진다. 민주공화국의 기반이 무너져 가는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이게 계엄 선포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사실이다.
한국인이냐고 묻는 외국인의 질문에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 적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986년 2월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이 '피플 파워'로 무너졌을 때다. 한국과 필리핀은 강력한 독재 체제를 가진 미국의 아시아 동맹국이었다. 그 중 하나인 필리핀이 먼저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 정부를 세우자 미국에서 한국은 필리핀보다 못한 정치 후진국 취급을 받았다. 당시 같은 과목을 수강하던 유럽 출신 학생이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을때 순간적으로 고민을 하다가 아니라고 말해버렸다.
두 번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결승전에서 미국 선수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경기를 하고도 역사에 남을 편파 판정으로 패해 눈물을 흘릴 때였다. 도서관 TV라운지에서 경기를 같이 지켜보던 흑인 청소부가 흥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다가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 회복과 법치를 가로막고 있는 대통령·여당·맹목적 지지자들의 행동과 말을 지금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군사독재까지 겪었지만 결국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뤄내고 전 세계가 선망하는 모범국가로 탈바꿈한 한국의 명예와 평판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있다. 만약 해외에서 마주친 외국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상황을 다시 맞이한다면 이번에도 "한국"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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