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민간공사 계약에서 '물가변동 배제특약' 무효 판결
원자잿값 폭등에 발주처-건설사간 공사비 마찰 다수
귀책사유 없다면 시공사·하청업체 공사비 증액분 회수 기대
[서울=뉴스핌] 이동훈 기자 = 대법원이 민간공사 계약에서 물가 상승분을 공사비 증액에 반영할 수 없는 '물가변동 배제 특약'이 무효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건설업계 공사비 논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일단 물가변동 배제 특약에 발목이 잡혀 원자잿값 상승분을 보상받지 못하던 상황에서 시공사의 협상력이 대폭 개선될 여지가 있다. 개별 사례에 따라 적용 기준이 일부 달라질 수 있지만 공사 진행에 특별한 귀책 사유가 없는 상태에서 그 부담을 시공사에 모두 떠넘길 수 없다는 판례가 나왔기 때문이다. 공사비 증액을 놓고 발주처, 정비사업 조합, 하청업체, 시공사 등의 공사비 협상이 더욱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25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최근 대법원이 발주처에 공사비 인상을 요구할 수 없는 '물가변동 배제 특약'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을 내리면서 건설사들의 원가율 부담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부산 A교회가 시공사와 건설공제조합을 상대로 제기한 선급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시공사와 조합이 승소한 원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판결됐다. 앞서 부산고등법원은 원심 판결에서 건설산업기본법(건산법) 제22조 제5항의 강행규정성을 인정했다. 도급계약 특약사항으로 물가상승 등으로 도급금액을 증액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는 부분 중 민간건설공사 표준도급계약 일반조건 제20조 제1항에 반하는 부분은 건산법 제22조 제5항 제1호에 위반해 무효라고 판단한 바 있다. 이어 대법원에서 심리 불속행으로 기각돼 시공사와 조합의 승소가 최종 확정된 것이다.
'물가변동 배제특약' 무효 판결로 시공사의 공사비 증액이 한층 수월해질 것으로 기대된다.[사진=윤창빈 기자] |
건설공제조합 관계자는 "물가변동 배제 특약을 전면 무효로 본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별 사례에 따라 판단이 일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시공사의 귀책 사유가 없는 상태에서 물가변동 배제 특약을 사유로 표준도급계약 일반조건을 위반해 원자재 가격 급등 부담을 시공사에 떠넘기는 것은 무효임이 확인됐다"며 "발주자와 시공사의 공사비 분쟁이 급증하고 있는데 법원이 구체적 사안에서 시공사 및 보증기관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공사 계약에서 '물가변동 배제 특약' 조항을 이유로 발주처가 공사비 증액을 거부한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대법원 판결이 큰 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다.
지난달 쌍용건설은 판교 신사옥 발주처인 KT에 추가 공사비 171억원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KT는 공사비를 추가로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채무부존재 소송으로 맞대응한 상태다. 국토교통부 건설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신청을 통해 원만한 협의를 기대했으나, KT는 법적인 판단을 받겠다는 입장이다. KT는 현대건설, 롯데건설, 한신공영 등과도 공사비 증액을 놓고 마찰을 빚고 있다.
다만 이번 대법원 판례는 교회측 이슈로 인해 시공이 늦어졌으며 준공이 되지 않은 건으로 준공과 정산이 완료된 KT와 쌍용건설 건과는 사안이 다소 다르다는 시각도 있다.
KT는 판교사옥 건설과정에서 쌍용건설의 요청에 따라 공사비 조기에 지급했고 설계 변경에 따른 공사비 증액(45.5억) 및 공기연장(100일) 요청을 수용했으며 이를 포함한 공사비 정산을 모두 완료했다고 설명했다. KT 관계자는 "회사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으로 그간 논란을 해소하고 명확한 해결을 위해 법적 판단을 받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DL건설은 안양물류센터 재건축사업 발주처인 LF그룹 및 코람코자산신탁과의 갈등을 겪고 있다. DL건설은 공사비 약 400억원의 도급 증액을 요청했으나 수용되지 않고 있다. 광주 주상복합건물 공사에서도 시공사인 현대건설 컨소시엄(현대건설⋅브이산업)은 원자잿, 인건비 상승을 이유로 공사비 140억원 증액을 요청했으나 발주처인 롯데쇼핑이 '물가변동 배제 특약' 조건을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공사비 증액분을 회수할 수 있다면 건설사 하청업체들도 원가율 관리에 한결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조경, 마감재, 단열 등 건설 하청업체에 시공사가 '물가변동 배제 특약'을 요구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원자잿값이 급격히 상승해도 이 조항을 이유로 공사비 증액을 거부하곤 했다.
지난 2021년 포스코이앤씨(엣 포스코건설)는 '물가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등 부당 특약을 설정했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1400만원이 부과됐다. 동원건설산업, 금호건설, 금강건설, 동양건설산업 등도 부당특약 설정이라는 불공정 하도급 거래행위가 적발돼 경고 처분을 받은 바 있다.
결국 '물가변동 배제 특약'의 전면 무효화로 발주처가 공사비 증액분을 수용해야한다면 시공사뿐 아니라 건설사 하청업체들도 원가율 상승으로 발생한 손실을 만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대형 건설사 자재담당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여파와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등으로 발생한 물가상승이 예측 범위를 벗어난 데다 한쪽에 너무 불리한 '물가변동 배제 특약'에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이 나온 만큼 발주처의 적극적인 협상 의지가 요구된다"며 "소송 중인 사안에서도 시공사에 유리한 판결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사비 분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란 관측도 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물가변동 배제 특약'이 무효로 본 결정이 나왔으나 시공사가 요구한 증액분을 발주처가 모두 인정, 수용해야한다는 뜻은 아니다"며 "그럼에도 이 조항에 발목이 잡혀 협상력을 높이기 어려웠던 건설사, 하청업체들이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leed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