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중러 정보당국 사활 건 싸움
일본은 대북, 중국은 대미에 무게
러시아는 비밀에 싸인 '크레믈린'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전쟁에는 우방이 있을 수 있지만 첩보전에 그런 건 없다."
11일 뉴스핌과 만난 정보기관 출신 전문가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치열한 첩보전쟁의 현장에서 뛰어본 경험이 있는 요원이라면 모두가 절감하는 말이란 게 그의 귀띔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로비. [사진=블룸버그통신] |
이 전문가는 서울이 이미 오래전부터 미일중러 등 주변 열강의 첩보전쟁터가 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최근 논란이 된 미 중앙정보국(CIA)의 한국 안보실 도청 사태를 계기로 방첩 시스템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유리창에 신호 쏴 대화 엿듣는다"...소설 아니라 실제로 가능
이번 논란으로 CIA를 비롯한 미 정보기관의 한국 내 활동과 첩보수집 능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 정보기관의 우리 대통령실 도청 논란에 대해 이 전문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장비가 투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어디가 어떻게 뚫렸는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정보기관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산 대통령실이 청와대 보다 도감청에 대응한 보안기능이 뛰어나니 마니 하는 정치권 논쟁도 의미가 없다는 게 이 전문가의 지적이다.
미국이 어떤 기술수준과 첨단 장비로 첩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 능력을 두고 갑론을박 한다는 건 난센스란 얘기다.
우리 대통령실과 정보 당국은 문제가 된 김성한 전 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 사이의 '우크라이나 전쟁 탄약 공급' 관련 대화 내용이 용산 대통령실 내부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다.
철저하고 까다로운 수준의 보안 설비가 갖춰진데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논의는 지하3층 벙커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도감청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대통령실 청사 모습. 2022.06.10 mironj19@newspim.com |
유리창에 전파를 발사해 방안의 미세한 음파를 감지해 대화내용을 파악해 낸다는 감청 방식에 대해서도 대통령실은 대체로 가능성을 부인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정보 수집 활동을 벌여온 베테랑 요원들은 "매우 일반적인 감청 방식인데 이를 부인하는 건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첩보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가능하고 애용해온 수법이란 것이다.
정보기관 출신 전문가는 "2000년대 초반 랭글리 CIA 본부를 방문해 합동 교육을 받을 때 실제 그런 장면을 시연한 바 있다"고 말했다.
당시 미 정보기관과 주요 정부부처 창문에 도청을 방지할 수 있는 500원짜리 동전만한 검은색 특수 패치가 붙어있는 걸 보고 흥미롭게 생각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복수의 정보 관계자들은 미국의 도감청 능력을 비롯한 신호정보(SIGINT) 수집 역량이 10~20년 전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했다고 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중 유리 사이에 음악이나 음파를 흘려 교란하거나 수돗물을 틀어 도청기에 노이즈를 주는 건 이젠 고전적 방법이 됐다는 것이다.
첨단 첩보위성과 컴퓨터 기술, 인공지능(AI) 등을 망라한 기술의 진보로 인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첩보수집이 가능해졌을 것이란 얘기다.
이런 배경에서 미국이 첨단 장비를 동원해 마음먹고 대화를 엿들으려 한다면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인도·태평양 사령관, 매일 바이든 대통령에 '김정은 감청 보고'
서울은 지금 미국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일본 등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이 모여 총성 없는 첩보전쟁에 한창이다.
활동의 기본은 대북정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일일 동선은 물론 핵과 미사일 도발과 관련한 움직임을 정밀 체크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사진=로이터 뉴스핌] |
존 아퀼리노 미 인도·태평양 사령관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김정은 감청정보와 동정을 비롯한 북한 동향을 보고하는 것이란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한국 정부의 대북관련 정보나 남북관계 현안은 물론 경제・통상 분야의 주요 움직임이나 핵심 인사의 동선까지 서울을 무대로 뛰는 해외 정보기관 I.O(Intelligence Officer, 정보 요원을 지칭)들의 활동 범위는 제한이 없다.
이 가운데 미국의 역량은 단연 압도적이라는 평가다.
최첨단 첩보위성인 키홀(KH-12) 등으로 북한 지역 뿐 아니라 한국과 주변 수역을 샅샅이 살핀다.
일명 '쓰리세븐'으로 불리는 우리 군 정보사 777부대의 대북감청도 대북정보 판단에 한몫을 한다.
이 과정에서 한미 연합 전력의 운용이나 한국 측의 언어・정보 지원은 효과를 극대화 한다.
미 정보기관에서 통역으로 근무한 한 관계자는 "북한 지역을 비행 중인 미그-29기 전투기와 지상 관제소 사이의 교신 내용도 100% 감청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확보된 감청 파일을 분석해보면 북한 공군 내부 사정을 상당부분 파악할 수 있는데, 욕설이 절반에 가까워 처음엔 놀랐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타고 다니는 국무위원장 전용차량인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600 풀만가드 리무진이나 전용열차・요트 등에서 나오는 대화나 교신 내용도 미 정보 당국은 대부분 파악된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로이터=뉴스핌] 김근철 기자=북한의 경호 요원들이 24일(현지시간)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한 뒤 숙소로 이동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용 리무진을 에워싼 채 철통 경호를 하고 있다. 2019.4.24. |
대북정보 관계자는 "북한이 인공위성 장비를 활용한 미국의 도청을 막으려 김정은 전용열차에 그물형의 보안 필름을 부착한 일도 있었다"며 "하지만 그 정도의 보안 장비로는 미국의 첨단 대북감시망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참사관인줄 알았던 러 정보요원, 알고보니 서울 거점 책임자
중국 정보기관도 핵심 역량을 투입해 한국 정부와 군의 동향을 중심으로 첩보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말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해외 중국 비밀경찰서' 문제도 결국 세계 각국에서 중국이 무리한 정보 수집 활동과 과도한 개입 때문에 불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 요원을 중심으로 유학생이나 상사주재원 등으로 위장한 첩보원들을 서울에 투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중 관계를 통해 북한 내부의 정보 등을 어느 정도 제공받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정보에 대한 집중도는 떨어진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대신 한국 내 첨단 산업정보와 중국 반체제 단체의 활동, 해외 정보기관 요원들의 서울에서의 동향에 관심을 보인다.
정부 당국자는 "미국이 서울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를 집중적으로 탐문하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러시아는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와 해외정보국(SVR)을 두고 해외・국내 정보 수집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서울에는 SVR 요원들이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2001년 서울 중구 정동에 새로 대사관 건물을 지으면서 자재와 장비를 러시아에서 직접 들여올 정도로 치밀한 보안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정동의 주한 러시아 대사관. [사진=뉴스핌 자료사진] 2023.04.11 yjlee@newspim.com |
지난 1998년 벌어진 아브람킨 사건은 러시아가 얼마나 치밀한 정보활동을 벌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 조성우 참사관 추방에 맞서 한국은 서울대사관의 올레그 아브림킨 참사관을 출국조치 했다.
참사관급 맞추방을 위한 조치였지만 아브람킨이 해외정보국(SVR)의 서울 거점장이란 사실이 뒤늦게 파악돼 우리 정부는 당혹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경우 '나이쪼'(內調)로 불리는 정보기관인 내각조사실 소속 요원들을 주축으로 방위성과 법무성 등에서 다양한 인력이 파견된다.
대북정보에 주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며 주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수집을 의미하는 휴민트(HUMINT) 방식의 정보 수집 활동을 한다. 대부분 한국말이 유창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뾰족한 대응책 없는 한국...외교적 부담 때문 강경대응에도 한계
서울이 미국을 위시한 주요국 정보활동의 앞마당이 되고 있지만 우리 정부가 이에 대응책을 세우기는 쉽지 않은 국면이다.
자칫 외교관계 악화라는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다.
무엇보다 미국 등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이 자국 요원의 해외 활동에 대해 사실을 인정한다거나 사과・재발방지 등의 조치까지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국가 간 역할 관계에 따라 정치・외교적으로 해결되거나 결국 유야무야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미국은 한국 내 첩보활동에 첨단 인공위성과 정찰기, 전자전 장비 등을 투입한다.
대북정보 등의 수집에 미국과의 정보협력이 필수적인데다 한미동맹이란 큰 틀의 대의도 무시할 수 없다.
[서울=뉴스핌]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SNS] 2022.11.13 photo@newspim.com |
기술적인 문제도 한계로 꼽힌다. 미국과 중국・러시아 등은 전세계를 상대로 첩보전쟁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돈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럴 이유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미국의 첩보수집 역량을 감안할 때 어디가 어느 수준으로 뚫리는 지 알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역대 어느 정부도 미국의 도를 넘은 정보활동에 대해 각을 세우거나 날카롭게 대응하는 방식보다는 원만한 해결을 모색하는 쪽을 택해왔다.
이번의 경우 오는 26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청 논란이 불거졌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고민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