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문재인 정부의 상징으로 불렸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5년 만에 문을 닫았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국민청원은 그 목적에 걸맞게 이룬 성과도 있지만 부작용도 적잖다. '현대판 신문고', '갈등과 선동의 공론장'이라는 엇갈린 평가 속에서 국민청원은 윤석열 정부에서 새로운 모습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다. 국민청원이 지나온 5년의 시간을 되돌아봤다.
[서울=뉴스핌] 지혜진 기자 = '국민이 물으면 답한다'는 취지로 문재인 전 대통령 임기 동안 운영됐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지난 9일 문을 닫았다. 지난 2017년 8월 개설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30일 안에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청와대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지난 2월 28일까지 누적 청원 게시글은 111만여건이며 이 가운데 20만명 이상 동의한 청원은 286건이다.
문 전 대통령은 새 정부 출범 성과 대국민보고에서 "국민이 선거 때 한 표 행사하는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민은 정당과 정책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국민청원은 이 같은 맥락에서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창구를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개설됐다.
청와대 국민청원의 긍정적 효과로는 정치적 효능감을 높였다는 점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약자, 소수자의 목소리가 공론화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이 꼽힌다.
◆청원 동의 인원 2억만명 이상…시민들의 정치적 효능감 증진
1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홈페이지를 접속해보면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상태다. 지난 2월까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방문한 사람은 5억1600만명 이상으로 누적 청원 동의자도 2억3000만여명으로 집계됐다.
청와대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해 8월 성인남녀 129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결과 93%가 국민청원 제도를 '알고 있다'고 답했고 63%는 국민청원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서울=뉴스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쳐2022.04.06 |
이처럼 국민청원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높아질 수 있던 까닭은 비교적 쉽게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적 효능감은 자기 행동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믿음이나 감각을 뜻한다. 투표 참여나 선거활동, 정치활동, 시위 등을 통해 느낄 수 있던 정치적 효능감을 국민청원 제도를 통해서는 온라인으로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형석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는 '새로운 국민소통 플랫폼으로서 청와대 국민청원' 논문에서 "청와대 국민청원 제도는 '범위나 종류에 제한이 없이' 어떤 사항도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어 사각지대 의제들이 다양하게 표출됐다"며 "청원 내용을 모든 국민이 함께 볼 수 있고 공유할 수 있으며 답변을 위해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요구해 집단 간 공감과 여론의 힘을 조성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각 부처 장관급, 청와대 수석급 등 최고 책임자의 책임 있는 답변이 나오도록 설계돼 국민이 기한 내 확실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정치적 효능감을 높여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냈다고 분석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그동안 정치나 국회에 대한 불신이 심해서 국민의 정치 참여 욕구가 떨어졌는데 국민청원이 이를 다시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평했다.
채 교수는 "엄격한 의미의 직접 민주주의는 아닐지라도 국민청원 제도를 통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그나마 호소할 수 있는 창구를 얻게 됐다"며 "정쟁적 성격이나 갈등 양상으로만 치닫는 등 보완해야 할 점은 있지만 국민이 공감대를 나누고 여론이 어떤지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인권·성평등 분야에 가장 많은 동의…약자들의 소통창구 역할
국민청원 제도는 사회적 발언권이 약한 이들의 소통창구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학교폭력, 성폭력 등 각종 폭력의 피해자들이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신의 일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2019년 국민청원 빅데이터 분석한 결과를 보면 국민청원 개설 이후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 답변을 받은 청원의 40%가 젠더이슈였다. 1만명 이상 동의를 얻은 청원 중에서도 젠더이슈가 25%를 차지했다. 국민청원에서 주로 다뤄진 젠더이슈를 사안별로 살펴보면 여성폭력·안전과 관련된 청원이 63%로 가장 많았고 ▲돌봄·일생활균형(12%) ▲여성건강·성·재생산(9%) ▲평등의식·문화(5%)가 뒤를 이었다.
역대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청원은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로 271만5626명이 동의했다. 2위 역시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 신상공개' 청원으로 총동의 인원수는 202만6256명이다.
청와대가 발표한 '국민과 함께한 국민청원 4년' 보고서를 보면 국민청원 신청 건수가 가장 많은 분야는 정치개혁(16.6%)이지만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청원은 '인권·성평등(18.4%) 분야였다. 그만큼 인권과 성평등 문제에 대한 지지가 높은 것으로 풀이된다. 뒤이어 동의 수가 많은 분야는 ▲정치개혁(14.3%) ▲안전/환경(12.1%) ▲보건복지(8.6%) ▲육아/교육(8.1%) 순이다.
특히 20만명 이상이 동의한 청원 글이 9건에 달했던 '텔레그램 n번방' 관련 청원은 범정부 합동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마련하고 성폭력처벌법·정보통신망법·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등이 담긴 'n번방 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민청원의 부정적 측면이 크다고 보지만 긍정적 역할을 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억울한 사람들이 하소연을 할 수 있는 창구였고 몇몇 사안의 경우 언론을 통해 공론화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채 교수는 "국민청원의 가장 긍정적 측면이 소수자, 약자, 피해자들이 직접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이들의 이야기가 단순한 호소에 그치지 않고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데까지 연결될 수 있다면 청원 제도의 장점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heyji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