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은 표현의 자유 vs 사생활 보호…가해자 악용 우려도
'배드파더스' 대표, 1심에서 무죄 받았지만 검찰 항소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하고 사생활 침해 처벌 조항 만들어야"
[서울=뉴스핌] 이정화 기자 = 허위가 아닌 사실을 알리더라도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있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재판소(헌재)의 판단이 조만간 나올 예정이다. 최근 국내로 송환된 디지털교도소 운영자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남성들의 신상을 공개한 배드파더스 대표가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각각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일각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과 전면 폐지의 목소리가 맞서면서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이 쏠린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이다. 앞서 한 시민은 2017년 8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수의사가 자신의 반려견을 잘못 치료해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을 온라인 등에 알리려 했지만, 사실을 알리더라도 형사처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돼서다. 지난 8일에는 사단법인 오픈넷·두루 변호사들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헌법소원심판 청구소송을 냈다.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의 모습. /김학선 기자 yooksa@ |
형법 제307조 1항은 허위 사실뿐 아니라 사실을 알린 경우에도 최대 2년 징역이나 5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으면 그 내용이 사실이라도 처벌이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가해자에게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소비자가 남긴 불만 글, 미투 고발, 내부 고발 등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다.
다만 형법 제310조에는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 대법원은 1993년 6월 선고한 판결에서 "적시된 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증명이 없더라도 행위자가 진실한 것으로 믿었고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없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실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법리 다툼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결과를 예상할 수 없어 비판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익 목적에서 사실을 알리더라도 고소 자체는 피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양육비를 주지 않은 남성들의 신상을 온라인에 공개한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본창(57) 씨가 대표적인 예다. 구씨는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300여명의 실명, 나이, 거주지 등을 공개했다는 이유다. 1심 재판부는 신상 공개에 따른 명예훼손보다 공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지만, 검찰은 항소했다.
손지원 오픈넷 변호사는 지난 10일 헌재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은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고소를 남발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위축시킨다"며 "진실한 사실을 고발한 사람들이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해 형사 피의자, 수사 대상이 되는 등 큰 고초를 겪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반론도 만만찮다. 지난달 10일 헌재에서 열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헌법소원 심판 청구 공개 변론에서 홍영기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인의 인격권도 헌법상 보호해야 하는 중요한 기본권"이라며 "개인의 명예가 완전히 상실된 상태라면 개인의 반론은 영향력 있게 작용하기 어렵고 한 번 침해된 명예는 회복하기 어렵다"고 했다.
명예훼손을 형법상 죄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이에 유엔(UN)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위원회(ICCPR)는 한국 정부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형사정책연구원이 2018년 발간한 '사실적시 명예훼손 행위의 규제 문제와 개선방안에 대한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명예훼손죄를 처벌하는 국가는 독일, 스위스, 일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실제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처벌하는 사례가 거의 없어 사실상 사문화됐고, 독일, 스위스 등에서도 사실을 알리거나 사실로 믿을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처벌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다.
박경신 오픈넷 변호사는 "해당 조항은 특정 사안에 대해 동료들 간의 자유로운 토론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며 "사생활 비밀을 우려하는데, 차라리 사생활 비밀에 대한 처벌 조항을 따로 만드는 걸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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