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선미 기자 = 시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결정에 중동의 지정학적 판도가 뒤흔들리고 있다.
이란의 세력이 더욱 확대되고, 이스라엘은 홀로 이란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했으며, 포로로 잡혔던 이슬람국가(IS) 전사 수천 명이 풀려날 수 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중동 외 지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등 본토에서 IS의 테러를 직접 경험한 동맹국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고,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유일한 어른’이라는 평가를 받던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사임 의사를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시리아에 주둔하던 미군 병력 고작 2000명을 철수하겠다는 것이지만, 이로 인해 중동 및 서구 열강들이 모두 개입해 대리전 형식으로 지속되던 시리아 내전이 더욱 복잡해질 전망이다.
우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을 찬성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이 빠지면 러시아가 시리아에서 마음껏 영향력을 펼칠 수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터키와 이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도 미군 철수로 큰 장애물이 제거되는 셈이다.
반면 시리아에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치르던 쿠르드족은 배신감을 느끼며 미군이 쿠르드족을 두고 떠나면 IS 전사 수천 명을 석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시리아 주둔 미군의 존재에 크게 의존해 이란을 견제하던 이스라엘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됐다.
이처럼 미국의 ‘작은 결정’ 하나로 중동 전체가 흔들리자 유관국들은 저마다 상대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이 이란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 터키가 러시아와 미국 사이를 이간질하려 할 것이며, 터키 위협에 직면한 시리아 정부는 쿠르드족과 협력해야 할 수도 있다.
시리아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미군과 시리아민주군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삐 풀리는 이란
시리아 주둔 미군의 존재는 누가 뭐래도 이란에게 가장 눈엣가시였다. 미군에 막혀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세력들이 이라크로부터 시리아로 건너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철수하면 이란은 이라크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전사와 무기, 심지어 첨단 미사일까지 시리아를 거쳐 레바논의 이란 파트너인 헤즈볼라에게 건네줄 수 있다.
또한 석유 매장량이 풍부한 북동부 지역에 손을 뻗어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에 따른 경제적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
◆ 망연자실 쿠르드족
미군의 철수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시리아 동부의 쿠르드족 동맹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 발표에 쿠르드족이 주도하는 시리아민주군(SDF)은 궁여지책으로 포로로 잡은 IS 전사 3200명의 석방을 논의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무스타파 발리 SDF 대변인은 이를 부인했지만, 시리아 주둔 미군 주도 연합군 소식통은 이같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NYT에 확인해줬다.
소식통은 “IS 전사들이 석방될 경우 최선의 방법은 시리아 정부가 이들을 잡아두는 것”이라며 “이들이 석방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 그야말로 재앙이 펼쳐지게 되고 유럽은 끔찍한 위협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SDF의 IS 전사 석방 위협을 단순한 엄포나 관심을 끌기 위한 생떼 정도로 일축하며, IS 전사들이 석방되면 자신들을 놓아준 쿠르드족을 향해 덤벼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꽤 신뢰할 만한 시리아 모니터링 네트워크로 알려진 시리아인권관측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SDF 지도부는 IS 전사들의 고국이 이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어 이들의 석방을 논의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리아인권관측소는 또한 SDF가 터키의 침공에 대비해 IS 전사를 비롯해 시리아 내 병력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시리아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미군과 시리아민주군 [사진=로이터 뉴스핌] |
◆ 터키의 쿠르드족 침공 위협 높아져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 결정이 터키에 쿠르드족을 침공해도 좋다는 승인이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만큼 터키의 쿠르드족 침공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미군 철수는 첫째, 터키를 위협으로 여기는 쿠르드족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며, 둘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쿠르드족 거점이 있는 시리아 북동부를 고양이 앞에 쥐처럼 놓아두고 가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터키 쪽에서도 침공에 따른 리스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외교협회의 스티븐 쿡 중동 전문가는 “터키가 실제로 침공을 강행하면 장기 게릴라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터키의 위협에 직면한 쿠르드족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화해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더욱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모종의 화해를 통해 쿠르드족은 아사드 대통령에게 충성을 약속하는 대신 제한적인 자치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사드 대통령과 러시아가 연합해 터키에 맞서게 되는 구도가 형성된다.
◆ 난감해진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선거를 앞두고 국가안보, 트럼프 대통령과의 특별한 관계, 이란 견제 등을 내세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도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 발표는 청천벽력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지난 17일에 철군 결정을 전해 들었다고 밝혔지만, 국제위기그룹(ICG)의 이스라엘 전문가 오페르 찰츠버그는 “이스라엘 정부도 불시에 당했다. 이틀 전에 알려줬다 해도 매우 긴밀한 동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미리 귀뜸해준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올해 초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고 이란 핵협정을 파기하는 등 네타냐후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올해를 마감하는 시기에 네타냐후 총리가 미국과 러시아 등 2개 열강과의 관계를 모두 잘못 계산했다는 평가를 면치 못하게 됐다. 지난 9월 이스라엘군의 오인 공습으로 러시아 전투기가 격추된 사건 후 푸틴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와의 회담을 거부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 전문가들은 미군이 시리아에서 철수하더라도 전략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미군 철수는 이스라엘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킬 수 있다고 관측되고 있다.
◆ 회심의 미소 짓는 러시아
미군의 철수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시리아에서 유일한 열강으로 남게 되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이 기회를 틈타 중동에서 구소련 시절의 역할을 되찾으려 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군 철수를 시리아 대리전에서 러시아가 미국에 이겼다는 것으로 포장할 수도 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중동·북아프리카 분과대표 리나 카팁은 “러시아는 미군 철수에 따른 공백을 이용해 시리아 내전을 마음대로 주무를 것이다. 러시아는 시리아를 실질적인 러시아 영토로 취급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즉각적으로는 러시아와 이란이 미군 철수에 따른 승자처럼 보이지만, 아사드 대통령과 동맹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와 이란 또한 경쟁 관계에 놓이며 또 다른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러시아는 시리아에 러시아에 충성할 강한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라는 반면, 이란은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약한 정권을 원하기 때문이다.
카팁은 “중동에서 러시아와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이란과 대척점에 서게 되는 새로운 축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로이터 뉴스핌] |
go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