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석유 무기화로 유가 오르면 미·중 무역전쟁보다 훨씬 심각한 여파
[서울=뉴스핌] 김선미 기자 =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 출신 언론인 암살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사우디가 45년 간의 금기를 깨고 석유의 정치적 무기화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터키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실종된 언론인 자말 카쇼기(60)의 암살이 사우디 왕실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사우디를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사우디는 보복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사우디 국영방송 알아라비야의 투르키 알다킬 대표는 14일 자사 논평에서 “미국이 사우디에 제재를 가하면 경제적 재앙을 맞게 될 것이며, 전 세계가 그 여파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는 “현재 사우디 정부는 국제 제재 시 이에 대응하기 위해 30개 이상의 조치를 검토 중”이라며 “이 조치들로 인해 사우디 경제보다 미국 경제가 훨씬 큰 파국적 피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유가가 배럴당 80달러만 돼도 분노하고 있는데, 사우디가 일일 750만배럴(bpd)의 산유량 목표를 포기하면 유가가 100달러나 200달러, 혹은 그 두 배로 오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IHS마르키트 컨설턴트로 오랫동안 석유수출국기구(OPEC) 전문가로 활동해 온 로저 디완은 사우디가 “매우 중요한 석유 시장의 금기를 깼다”고 말했다.
사우디가 이러한 위협을 실행에 옮길 가능성은 낮지만, 석유를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암시만 해도 사우디는 세계 경제 안정을 유지하는 강력한 주체로서의 힘을 과시하게 된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분석했다.
골드만삭스 상품 리서치 헤드인 제프리 쿠리는 “석유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중동발 긴장에 이제 사우디까지 가세했다”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산유량 추이 [자료=블룸버그 통신] |
워싱턴 주재 사우디 대사관은 알다킬 대표의 논평이 사우디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해명했으며, 사우디 관료들도 석유와 정치를 연관짓지 않는다는 사우디 왕실의 정책은 변함없다고 전했다. 칼리드 알 팔리 사우디 에너지 장관도 인도에서 연설을 통해 사우디는 책임감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석유시장을 계속 안정시킬 것이라며 시장 달래기에 나섰다.
하지만 알다킬 대표의 논평은 사우디 왕실이 외교적 채널 외의 수단으로 국제사회에 경고를 암시한 것이거나 시범적으로 위협을 해 보고 그 효과를 가늠해보려는 전략일 수 있다는 해석이 분분하다.
효과는 즉각적이고도 분명히 나타났다. 이날 런던선물시장의 북해산 브렌트유는 2%의 오름폭을 보였다.
사우디는 수십 년 간 석유와 정치는 별개라는 전통적 외교 정책을 절대 깨뜨리지 않았다. 최근 캐나다와의 외교 마찰로 거의 모든 경제 관계가 단절됐던 당시에도 사우디 왕실은 석유 수출 기업들은 정치적 상황에 연루되지 않을 것이라 명시했으며, 국영 석유회사 사우디아람코는 캐나다 정유소에 계속 원유를 공급했다.
사우디가 산유량을 줄여 유가가 급등하면 단기적으로는 세계 경제를 그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있다. 사우디는 전 세계에 공급되는 원유의 10분의 1을 생산하며, 공급 부족 시 대응할 수 있는 유휴생산능력을 갖춘 거의 유일한 산유국이다. 따라서 사우디가 미국의 원유 금수에 따른 이란산 공급 중단에 따른 부족분을 상쇄하지 않겠다는 신호만 보내도 유가는 금새 배럴당 100달러로 오를 수 있다.
외환중개업체 오안다의 스티븐 인스 아시아태평양 트레이딩 부문 대표는 “사우디가 보복 수단으로 원유 카드를 꺼내들면 글로벌 시장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며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이 그저 시시한 비디오 게임 정도로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산유국들의 재앙으로 변모할 수 있다. 사우디가 석유를 무기화하면 중기적으로 석유 수요가 급감하고 재생 에너지와 전기자동차 수요가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73~1974년 원유수출 엠바고나 1979년 이란혁명에 따른 오일쇼크 이후, 선진국들이 휘발유와 디젤에 세금을 부과하고 에너지 절약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글로벌 석유 수요가 거의 초토화된 바 있다. 이에 따라 지금도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의 석유 소비량은 1974년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사진=블룸버그 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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