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 시대 최대 규모 자랑하는 왕궁리 유적지
쌍릉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것?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18일 인골 분석 결과 발표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백제는 익산으로 천도했을까.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왕은 천도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을 확인할 유적지는 존재한다. 바로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쌍릉, 그리고 미륵사지다.
왕궁리 유적지는 동서 245m, 남북 290m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한다. 이는 백제시대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조선왕조 경복궁 근정전의 크기와 버금간다.
[익산=뉴스핌] 이현경 기자=왕궁리 유적지 5층석탑 2018.07.13 89hklee@newspim.com |
궁은 남쪽 담장에서 최대한 북쪽으로 건물을 치우치게 지었다. 앞에는 정전과 왕궁 시설물이 있었다. 익산시 문화해설사는 "마당을 만들어 왕과 관리가 의식, 의례를 치르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익산시 문화해설사는 "마당을 만들어 왕과 관리가 의식, 의례를 치르는 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왕과 왕의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 13개 동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왕궁 뒤쪽으로는 후원으로 왕가가 쉴 수 있는 큰 정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왕궁은 백제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주변 발굴 조사 과정에서 '수부(首部)'가 출토됐다.
수부는 관청의 우두머리로 해석할 수 있다. 익산 문화해설사는 "수부가 나왔다는 것은 왕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왕이 있는 곳에 공급하는 도장 찍은 기와로 알려졌다. 공주 공산성에서도 도장 찍은 기와가 나왔는데 '수부'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나온 적은 없다. '수부'가 찍힌 기와는 부여와 익산에서만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익산=뉴스핌] 이현경 기자=왕궁리 유적지 2018.07.13 89hklee@newspim.com |
백제 멸망 이후 왕궁터에 사찰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시 문화해설사는 "사찰로 바뀐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삼국사기에 무열왕이 죽기 전, 금마지(옛 익산)의 대관사에서 핏빛이 돼 오보가 흘렀다고 돼있다. 대관사라는 기록이 있는데 왕궁리 유적 서쪽과 북쪽의 담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관관사'라고 쓰인 기와가 1000점 가까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삼국사기에 나온 대관사와 왕궁리에 출토된 대관관사의 명문 기와로 두 곳을 같은 사찰으로 가정했을 때, 늦어도 의자왕 때 왕궁에서 사찰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5층 석탑이 세워진 것 역시 사찰로 바뀌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 석탑은 본래 목탑이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석탑에서 나온 유물로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사리장엄구와, 금동여래입상이 나왔는데 사리장엄구를 봤을 때는 백제 시기로 금동여래입상으로 봤을 때는 통일신라나 고려로 볼 수 있다고 해설사는 가정했다.
이 석탑은 백제 정림사지 5층석탑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왕궁리 5층 석탑을 백제계 석탑으로 보고 있다. 부여군 차선미 해설사는 "요즘에는 학자들 사이에 고려시대 사찰로 보거나, 백제계 석탑으로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무왕이 수도를 옮기려고 왕궁을 조성했던 왕궁리 유적이다. 특징이 담장이 그대로 있다. 하지만, 역사에 백제가 익산으로 수도 옮겼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무왕이 익산으로 옮기려고 왕도를 조성했을 뿐이다. 유적이 온전히 남아있기 떄문에 백제 역사부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돼서 세계유산에 등재가 됐다"고 가치를 설명했다.
[익산=뉴스핌] 이현경 기자=판축법으로 지어진 쌍릉을 설명하는 이문형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2018.07.13 89hklee@newspim.com |
이 해설사는 왕궁이 사찰로 바뀐 이유로 부근에 쌍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공간의 역할을 했을 거라는 분석을 제기했다. 그는 "무왕의 릉을 부여에 있을 거라는 주장도 있지만, 쌍릉을 무왕의 능으로 보자면, 무왕을 기리기 위해 쌍릉 바로 옆 왕궁을 사찰로 바꿨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해석했다.
이어 "백제 무왕, 금마지로 천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익산에 왕궁 유적이 있고 왕궁에서 나온 유물은 현재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며 "유적지의 유물과 기록을 통해 익산의 백제왕도와 관련한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익산으로 천도를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논란을 피하고 왕릉지 자체가 천도를 전제로 했다는 의미로 본다"고 설명했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되는 쌍릉도 백제가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근거가 된다. 대왕릉, 소왕릉이 나란히 있어 쌍릉으로 부른다.
[익산=뉴스핌] 이현경 기자=굴식돌방 무덤 형태인 쌍릉 2018.07.13 89hklee@newspim.com |
대왕릉은 중앙에 입구가 있고 단면육각형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백제 사비시대(7세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됐다. 판축기법이 최초로 사용된 점도 눈길을 끈다. 또, 인근 미륵사가 무왕시대에 착공된 것을 감안하면 쌍릉이 무왕의 무덤이라는 것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최완규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은 "무왕이 건설한 수도에 묻히는 건 당연하다. 백제의 수도라는 게 중명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부여 능산리에 있는 어느 고분보다 이 고분의 규모가 크다. 봉토도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능은 왕릉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쌍릉은 지난해 8월 문화재청(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의 발굴조사가 진행되기 전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1917년 12월 추정)에 쌍릉은 첫 발굴됐다.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지배 정책의 합리적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1916년부터 본격 추진된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당시 관대, 금구 등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전시된 바 있다.
[익산=뉴스핌] 이현경 기자=일제시대 도굴한 흔적 2018.07.13 89hklee@newspim.com |
이문형 책임연구원은 쌍릉에서 관, 토기 소소도제완, 금구 등이 일제시대 발굴 조사 당시 나왔고 이를 통해 백제 시대 왕릉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관재는 일본의 고야마키다. 백제 왕릉에서는 고야마키 나무를 썼다. 그리고 금구를 보면 문양이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과 같다. 연꽃무늬와 새김기법"이라며 "소왕릉에서 나온 금구에는 조임기법이 쓰였다. 백제 금속 역사에서 조임기법이 빨랐다. 그래서 소왕릉이 더 빨리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대 위에는 토기가 있었다. 이 토기가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은 쌍릉을 무왕의 무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문형 책임 연구원은 이 토기가 백제 7세기에 만들어질 것으로 해석했다. 이문형 연구원은 "등잔으로 사용한 토기로 '소소도제완(素燒陶製盌)'이다. '소'가 '불싸를 소(燒)'다"라며 "신라 7세기에 이러한 토기를 쓰지 않았다. 신라에서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너무 격이 낮다. 당시에 유행하던 것도 아니다"라고 답했다.
[익산=뉴스핌] 이현경 기자= 관대 위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된 곳 2018.07.13 89hklee@newspim.com |
2년 전에는 쌍릉 대왕묘에서 성인 여성 치아 4점이 출토됐다. 치아가 작아서 여성의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치아로 성별을 추정할 수 없다고 이 연구원은 말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치아의 마모 상태는 음식과 연관이 있다. 일본 애도 시절 50대 장수가 죽었는데, 그의 치아를 분석해보니 20대로 나왔다. 그가 음식을 아주 고운 것만 먹은 거다. 그러니 치아로만 성별을 추정하는 데 무리가 있다"고 봤다.
최근 무덤에서는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됐다. 이는 1917년 발굴조사 시 피장자의 인골을 수습하다 봉안된 것으로 추측된다. DNA를 분석해보면 성별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마한백제연구소는 결론을 내렸다. 추후 마한백제연구소와 쌍릉 연구를 함께 진행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인골분석 결과를 오는 18일 발표할 예정이다.
89hk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