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산불'은 오는 10월 25일부터 29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공연된다. <사진=국립극장 제공> |
[뉴스핌=최원진 기자] 때는 1951년 겨울 한국전쟁. 남자는 없고 과부들만 사는 어느 마을에는 한 남자가 숨어들고 두 여자의 마음에 뜨거운 불덩이가 인다.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라 손꼽히는 차범석의 '산불'이 국립창극단에 의해 새롭게 탄생했다. 26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두 번째 무대에서는 더블캐스팅 규복 역의 박성우, 점례 역 이소연, 사월 역 류가양이 스테이지를 장악했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깊은 내면에 초점을 맞춘 원작은 현대적인 사운드와 세련된 무대 장치를 통해 친근하게 관객들을 찾아갔다. 특히, 움직이는 타원형 무대와 천 그루가 넘는 실제 대나무로 채운 구성은 관객들 감탄을 자아냈다. 여기에 전쟁에 죽은 남자 귀신들, 점례의 남편 등 새로운 등장인물이 추가돼 원작과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국립창극단의 재해석에는 코믹한 요소가 있어 자칫 무겁기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살짝 띄우는 역할을 해냈다. 점례의 시누이 귀덕은 전쟁 중 폭격소리에 정신을 놓아버린 캐릭터. 시도 때도 없이 까마귀를 내쫓고, 싱글벙글 웃으며 내뱉은 천진난만한 말이 웃음을 자아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까마귀들도 웃음 포인트였다. 특히 관객들을 폭소하게 만든 건 노망난 점례의 시할아버지, 김 노인. 마을 과부들이 무거운 이야기로 심각한 상황일 때 "어미야 배고프다" "어미야 요강 어디 있느냐"라고 분위기를 깬다. 마을 과부들을 보고 "모두 내 여자! 내 세상이로구나"란 대사에서 관객들은 속수무책으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26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진행된 국립창극단 '산불'에서 사월 역 류가양이 자신을 비난하는 마을 과부들에 소리치는 장면 <사진=국립극장 제공> |
"우릴 이렇게 만든 세상이 죄지. 내가 왜 죄요."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가수들의 가창력과 명연기였다. 특히 사월 역은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갓난아이가 있지만, 모성애보다 본능적 욕망이 우선인 인물이다. 규복을 숨기고 보호하는 점례에게 하룻밤씩 번갈아 가며 공유하자고 요구하는 당돌한 여자다. 어떻게 보면 사월의 태도가 이기적이고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란 비이상에서 정상적인 사월의 생각과 행동을 바라는 것 역시 모순일터. 류가양은 호소력짙은 목소리와 세심한 연기 톤으로 사월의 솔직한 감정을 잘 표현해냈다. 사월은 규복의 아이를 배고 마을 과부들에 질타를 받는 장면에서 류가양은 허스키한 창극 톤으로 절규한다. 이어 자신을 "차라리 죽어라"라며 매질하는 어머니 최씨에 "남편 잃은 젊은 과부가 사내를 그리워하는 게 죄요?"라고 반문한다. 초점 잃은 눈빛과 자신은 억울하다며 소리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최씨는 뒤돌아선 자신의 딸에게 "다들 참고 사는데 왜 너만 그래"라고 되묻는다. 전쟁은 남자들이 저질러놓은 비이상적인 '불장난'이라고 한다면 마을은 과부들이 참고 참으면서 지켜온 이상적인 사회다. 만약 사월의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마을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면 사월은 자신이 목격한 점례와 규복의 밀회를 눈감아줬을지도 모른다.
26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진행된 국립창극단 '산불'에서 양씨 역 유수정이 며느리 점례 이소연에 대밭을 지키라고 당부하는 장면 <사진=국립극장 제공> |
'산불'의 주인공은 규복 역의 박성우와 점례 역 이소연, 사월 역 류가양이지만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건 한국전쟁 당시 보릿고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현실적인 연출에 있다. 어느 날은 산도적떼가, '빨갱이'가, 왜놈들이 마을을 찾아와 먹을 걸 다 뺏어가고 마을 과부들은 먹을 게 없어 봄에는 대나무 죽순을 팔아 연명한다. 점례는 힘든 살림에도 불평불만 없이 시어머니와 시할아버지를 모시고, 마을에 남자가 없어 매일 죽창을 깎는 모습은 픽션이 아닌 1950년대 우리나라의 모습이었다.
창극으로 재탄생한 '산불'. 과거 한국전쟁에서 힘들고 어려웠던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국립창극단 단원들의 훌륭한 가창력과 연기력도 단연 돋보였던 무대다. 한편 25일에 열린 국립창극단 '산불'은 2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뉴스핌 Newspim] 최원진 기자 (wonjc6@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