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계, 일자리 주체 배제한 일자리 정책 제대로 될까 의문 높아
기업 관계자 "소통과 협치로 정책 도출해야 정부 성과도 빛날 것"
[뉴스핌=이강혁 기자] 어제 월급을 지급했는데, 왜 또 오늘이 월급 날이지.
박 부장 저 친구는 늘 물 한번 마시고 종이컵을 버리네. 최소 10번은 마시고 버려도 되겠구만.
김 과장은 중요한 문서가 아니면 이면지 좀 활용해라. 종이 한장이 그냥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아나.
이 대리 오늘도 야근하네. 업무시간 내에 마무리 못하고 왜 맨날 야근이야. 텅빈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하는데 전등을 또 다 켜놨네. 어이구.
▲재계 이미지 컷. |
중소기업 대표 A씨는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경영자가 되고보니 비용이 들어가는 문제는 경영과 직결돼 무엇이든 예민하다.
경영자로 변신하기 이전엔 그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물 한잔 마시고 버린 종이컵이 셀 수 없고, 프린터해 놓고 제대로 보지않고 버린 종이가 산더미다.
직장인으로 살아갈 땐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상이, 요즘 그에게는 대부분 걱정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직원들에게 당장 이런 말들을 꺼내기는 부담스럽다. '속 좁은 대표'라는 수근거림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근로시간 단축에 최저임금 인상 기류까지. 인건비 등 지출은 계속 늘어날텐데 이익은 제자리 걸음이다. 고정비 상승은 회사의 존폐를 걱정해야할 고민으로 눈앞에 닥쳤다.
'아. 올해 하반기 신입직원은 뽑지 말고 경영상황 좀 지켜봐야겠다.' A씨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2일 한 대기업 임원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자신의 친구 사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생각이 180도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가 핵심은 아닌 듯 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이 관계자는 "중소기업이나 프랜차이즈 가맹점 같은 곳들은 근로시간이 단축되고 최저임금이 크게 높아지면 인건비 부담에 제대로 경영하기 어렵게 된다"면서 "벌써부터 채용을 줄인다거나, 차라리 다른 일 찾아보자는 중소·상공인도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정부가 어느 정도의 합리적 수준을 제시할지 모르겠지만, 일자리 주체를 배제한 일자리 정책이 얼마나 질이 높을지 의문"이라며 "일방통행식으로 밀어붙여서는 문제해결의 올바른 답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경영애로사항을 빗대, 새 정부의 '경영계와의 불통(不通)'을 지적하고 싶었던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 설치된 대한민국 일자리 상황판을 보며 추진상황을 점검하고, 취업인구가 늘어나길 기원하며 박수치고 있다. 문재인(왼쪽부터) 대통령, 이용섭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정병헌 정무수석,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김수현 사회수석.<사진=뉴시스> |
경영계가 정부의 일자리 창출 광속행보를 두고 크게 우려하고 있다. '정부 초기에 찍히면 끝장'이라며 바짝 몸을 낮추고 있지만, 언제까지 숨죽여야 하는지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업종과 기업의 특성, 경영의 효율성과 자율성이 무시된 채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친다는 노골적인 비판도 있다.
이와 관련해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지지가 높은 상황에서 대통령까지 나서 '반성하라'고 호통을 쳤으니 누가 의견을 내고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겠냐"면서도 "기업도 국민인데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최소한 소통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여러 기업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선제적으로 조치하려는 것도 사실 서슬퍼런 정부에게 찍히면 큰일난다는 속내가 깔려 있다. 일자리 정책의 주요 이슈인 비정규직 해소에 발빠르게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새 정부에서 얻어터지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이것도 일종의 '보험' 성격인 것이다.
이 관계자는 "기업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인데 비정규직 문제에 사실상 증세까지 서두르다보니 기업들의 움직임에도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실제 SK브로드밴드가 협럭업체 직원 5200명을 정규직으로 고용한다고 밝히는 과정에서 협력업체는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문을 닫게 생겼다. 일부 협력업체 대표는 중소기업의 기술 인력을 빼간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불공정 거래행위 신고까지 했다. 당분간 잡음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20대 그룹의 한 임원은 "일률적인 정규직 전환은 복잡한 경영과 고용구조를 모르는 탁상행정일 수 있다"면서 "일자리 정책을 짜면서 어떻게 기업 목소리만 빼고 이야기가 될 수 있겠냐"고 꼬집었다.
또다른 그룹의 관계자도 "건설적인 대화가 지금부터라도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이전 정부와 프레임만 바뀐 것 아니냐는 의문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라고 의견을 전했다.
이 관계자는 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문제라기 보다는 동일한 일을 하면서 동일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아니냐"며 "소통과 협치의 대상에 기업까지도 포함해 이런 현실적인 일자리 정책을 도출해야 결국 새 정부의 성과도 빛이 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정부와 기업은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부터 다르다.
단적으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분기말 기준, 삼성전자는 본사에서 685명의 기간제근로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전체 직원수(9만4283명)의 0.7% 수준이다. LG전자의 경우는 500명으로 전체(3만7856명)의 1.3%다. 현대차는 3%, SK하이닉스는 0.3%, 포스코는 1.8% 등이다.
이는 고용노동부 공시를 바탕으로 집계한 노동게의 비정규직 수치 31%와는 엄청난 차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집계한 지난해 300인 이상 대기업의 비정규직 비율 평균(42%)과도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뉴스핌 Newspim] 이강혁 기자 / 재계팀장 (ik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