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암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중학교 일학년 때 사진반에 들었는데 어둑한 실내의 용기에 특수 용액이 들어 있었다. 필름이 담가졌다. 현상하는 중이라고 들었다.
요즈음 스마트폰의 사진은 실시간대이다. 방금 찍은 사진을 갤러리 앱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당한 시간과 절차가 필요했다. 현상을 거친 필름은 음화가 된다. 그것을 다시 인화지에 양화시킨다. 건조하면 사진이 되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에 이어 스마트폰에 밀려 퇴조되다시피 한 사진관에서 그런 작업이 이루어졌다. 나는 그 과정도 신기했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암실이라는 존재가 더욱 그랬다. 빛을 차단한 그 방이 아니고는 사진에 관한 한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빛이 있으라. 성경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빛은 만물의 시작이다. 태양계로만 축소해도 햇빛이 없다면 뭇 존재들의 근거가 사라진다. 그런데 빛의 조화로 생성된 인간은 그 혜택에 만족하지 않고 빛 속에 배반의 집을 짓는다.
그 댓가는 보복 같은 게 아니다.
추억을 보존할 수 있다. 사라져가는 게 본질인 시간을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십년이든 삼십년이든 사진은 관리만 잘 되면 영속된다.
극장이 내겐 낯설게 여겨지곤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암실과 닮은 면이 있는 것이다.
암실과 극장 두 곳에 공통으로 있는 것이 필름이다. 지금은 이미지 센서로 대체되어 구닥다리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사진의 기원부터 심플하게 말한다면 어두운 공간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킨 것이 첫 걸음이었다. 벽면에 바깥의 풍경이 상으로 맺힌다. 그것의 기록을 위해 필름이 발명되었다. 현상과 인화를 위해 특수 용액이 만들어졌다.
암실 안의 필름이 현상, 인화를 거쳐 사진으로 나온다면 극장의 영사기에 든 필름은 스크린에 투사되어 영상을 만든다.
대개의 공간들이 안의 어둠을 물리쳐 밝게 하려는데 반해 극장은 빛을 물리쳐 어둡게 만든 것이 핵심이다. 필름과 그래야만 호응된다. 암실과 같은 구조이다.
빛을 신성시하고 어둠을 부정하는 종교나 사상이 지배적인 사회라면 금기되거나 발각 즉시 처벌이 가해질지도 모른다. 이치적으로 본다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역행하는 것이다. 하긴 전기의 발견 및 발명 자체가 그럴 것이다. 자연 속의 비밀을 이용해 자연에 색다른 옷을 입혔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암실과 극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하고 좋아한다. 다만 그것들의 발생학적 특징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호사가적인 취미가 아니라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이다.
어둠으로 만들기 위해선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이야 공간이 아예 극장식 구조로 되어 출입구를 닫고 조명을 끄면 되지만 어릴 적의 극장엔 창이 있었다. 커텐이 두툼하게 있어서 영화 시작 전에 내려야 했다.
어둠을 몰아내는 공간과 빛을 몰아내는 공간의 공존.
도시의 특징 중 하나로 보인다. 시골에 극장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이 영화를 보려면 도시로 나와야 했다.
서커스는 시골에도 있었다. 그러나 서커스의 천막은 빛을 없애야만 하는 극장과는 달리 평범하다. 빛이 들지 않는 광도 시골에 있지만 극장과는 다르다. 간장 항아리는 뚜껑으로 빛이 차단되어 발효에 도움을 주는 면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두는 때도 많고 뚜껑에서 일반적인 용도가 더 강하다. 그 시절의 도시와 시골의 개념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 본다.
도시: 어둠을 몰아내는 공간과 빛을 몰아내는 공간이 공존하는 곳
시골: 어둠을 몰아내는 공간만이 있는 곳
이미지 대립을 통한 비교에 의도가 있기에 정확성이 다소 딸리더라도 양해가 되면 좋겠다. 이렇게 러프하게 본다면 도시라는 것이 얼마나 얌체 같은가. 영악하고 얄밉고 괴상하지 않은가.
시골이 자연이라면 도시는 문명이다. 도시는 자연에 대한 위반이자 반역이자 음모이다.
인류 역사상 어느 시점까지는 시골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전통적인 도시들이 생겼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골과 도시의 차이는 저런 해괴한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들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가령 인구수나 상수도의 수, 관청의 유무 같은 것들 말이다.
암실의 등장으로 인해 시골과 도시에 대한 전통적인 기준이 깨지고 전혀 생뚱맞은 것이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기준 자체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전기의 등장으로 인해 밤이 낮처럼 된 것이 물론 근본적이며 중요한 변화이다. 암실은 그러한 변화 속에 또한번의 임팩트를 가한다. 낮이 밤으로 바뀌는 것이다. 극장은 낮을 밤처럼 만든 공간에서 빛과 어둠을 조합해 마술을 부린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골과 도시를 구분짓는 저런 류의 새로운 기준과 그에 따른 이미지들이 현대적 도시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게 바로 도시이다.
그런 특징이 지금도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익숙한 나머지 사라진 듯 보이는 것이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시골에도 극장이 들어오고 또 그것과 별 다름없는 티브이나 흡사한 기기들이 다 들어와 옛날의 시골과 다르다. 시골이 도시를 닮아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그 옛날의 시골을 만나려면 지구촌의 오지 중의 오지들을 찾아다녀야 할 것이다. 별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의 주요 특징으로 보이는 저 낯선 느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본다. 매일 그 생각만 한다면 정신병원에 갈지도 모르지만 생각이 아주 없다면 도시에 대해 무지하게 된다.
사람의 탄생 과정은 알면서도 도시의 그것을 모른다면 일단은 창피한 노릇이다. 도시를 만든 인간의 탄생 과정에 밝은 인간이 자신보다 하위 개념인 도시에 대해 표층만 안다면 진정한 지식과 지혜를 상실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도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누가 세우기 시작했고 누가 계승해 만들어가고 있으며 지금은 누가 주인인가.
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범죄에만 신경을 빼앗기지 말자.
도시 자체를 누가 훔쳐가지 않는지, 변질시키고 있지 않는지, 도시가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서만 굴러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물론 이미 말했듯 암실과 극장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사진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한다. 사진과 영화 모두 빛과 어둠을 활용한 발명품이자 예술이다. 인간은 빛 속에 어둠을 만들고 그 안에서 빛과 어둠을 재가공하면서 탁월한 빛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들이 없다면 도시는 건조한 사막 같을 것이다.
그런 점에 경탄의 박수를 침과 동시에 도시에 대해 그 뿌리부터 알아야만 그 위에서 움직이는 수상한 것들을 포착할 눈이 길러지기에 암실을 포함해 MRI를 찍어본 것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