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 글 장주연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단편 데뷔작 ‘숲’(2012)으로 그해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까다로운 심사 탓에 4년 만에 선정된 (그것도 무려 심사위원 만장일치)대상이었다. 이듬해 친동생인 배우 엄태구를 주연으로 내세운 장편 ‘잉투기’(2013)를 선보였고,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단숨에 충무로를 이끌 재목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3년 후, 그가 다시 극장가를 찾았다. 이번엔 멈춰버린 세계와 시공간의 왜곡, 여기에 타임슬립 설정이 더해진 판타지 동화다. 지난 16일 개봉한 엄태화 감독(35)의 첫 상업 장편 영화 ‘가려진 시간’은 화노도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사건 후 며칠 만에 어른이 돼 나타난 성민(이효제·강동원)과 유일하게 그를 믿어준 소녀 수린(신은수), 둘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아직 실감이 안나고 불안하고 얼떨떨해요. 부담스럽거나 아쉽지는 않아요. 작품적으로 제가 마음대로 하지 못했으면 그건 감정이 있을 수도 있는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죠. 첫 번째 상업 작품인데 여러 가지 행운이 따라던 것도 있고, 오히려 담담한 편이에요. 그래도 만드는 과정에서 행운이 많이 따랐죠. 감사하게 생각해요.”
행운이 많이 따랐다는 말. 거기에는 수많은 것이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행운을 꼽으라면 단연 강동원의 출연이다. 엄태화 감독은 자기의 첫 상업영화 데뷔작에 충무로 흥행 불패 카드 강동원을 앉혔다.
“시나리오를 먼저 보내고 설득하려고 할 말을 준비해서 갔어요. 근데 막상 만나보니 동원 씨가 너무나도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더라고 있었죠. 본인이 왜 이 시나리오에 필요한지, 또 어떤 지점이 고민인지 편하게 말해줬어요. 제가 설득할 필요도 없었죠. 재밌었어요. 그렇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거요. 이쪽 계통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이고 배울만한 지점이라 생각했죠. 촬영하면서도 편했어요. 자라온 시대가 비슷하잖아요.”
엄태화 감독이 강동원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사실 단순 티켓 파워나 연기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 중 강동원에게만 있는 하나. 그건 소년미 가득한 비주얼이었다. 그래야 스물한 살이나 어린 신은수와 어우러질 수 있었고, 그래야 소아성애 등의 위험한 논란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동원 씨를 캐스팅한 거 자체가 그런 지점들 때문이었죠. 아이처럼 보이는 순간이 필요했고 수린과 위화감도 없어야 했어요. 강동원이란 배우라면 그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랬고요. 또 주의한 건 영화 속 어른들이 일차원적인 악당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거였죠.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어른들로 그리고 싶었어요. 전 이 아이들을 둘러싼 상황, 세상이 안타고니스트가 되길 바란 거지 특정 대상이 악당이 되길 바라진 않았어요.”
엄태화 감독의 말대로 ‘가려진 시간’에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명 쯤 있을 법한 어른들은 모두 이해 가능한 범주 안에서 움직인다. 이는 그의 전작 ‘잉투기’와도 꼭 닮아 있었다. 하지만 두 작품의 전체적인 색깔은 완전히 다르다. 실제 ‘가려진 시간’이 베일을 벗은 후 가장 많이 쏟아진 평도 “기존의 엄태화 감독의 색깔과는 다르다”는 거였다.
“‘잉투기’는 실제 대회라 베이스가 더 현실적이었어요. 또 제가 장난기가 많아서 블랙 코미디 요소도 많이 섞었고요. 반면 이번 작품은 전혀 다른 제 취향이 투영됐죠. 사실 제가 판타지 순정만화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클램프의 ‘성전’이나 ‘세븐시즈’ 같은. 그리고 이렇게 제가 재밌어하는 걸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어요. 실제로 이번 영화에서 시간이 멈춘 후 아이들이 백화점에서 보는 책도 ‘세븐시즈’죠(웃음).”
엄태화 감독은 이런 만화들이 자신이 작품을 만드는 상상력의 또 다른 기반이 된다고 했다. 물론 만화 외에도 하나를 더 꼽자면 건 그림이다. 그는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 때 하나의 그림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왔다. ‘가려진 시간’도 예외는 아니다. 알려졌다시피 ‘가려진 시간’은 한 남자와 소녀가 바다를 바라보는 작자 미상의 그림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이미지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전 영화가 대사보다는 이미지랑 싸우는 예술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림은 원래 좋아했죠. 전공도 미술이고요. 특히 아버지가 그림을 좋아하세요. 직업은 아니신데 실력도 수준급이시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체득이 된 듯해요. 영화를 만들 때도 그림으로 시작하는데 소재를 정해놓고 찾진 않아요. 이번에도 그랬고요. 미리 주제를 잡고 가면 강요처럼 그려질까 봐요. 물론 처음엔 제 무의식이 들어가서 글이 산만하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정리가 돼요.”
차기작으로 염두에 둔 그림이 있느냐고 물었다. 엄태화 감독의 “아직”이라고 말을 아꼈다. 정해진 거라면 SF호러물이라는 것 정도. 다만 늘 그랬듯 이번에도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넘나들 영화를 만들고 싶다.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어요. 그냥 이런 작품을 하고 싶다는 정도죠. 현실과 비현실은 넘나들 거고요. 전 우연성, 직관성을 믿어요. 그때그때 들어오는 어떤 이미지가 있겠죠. 만일 그게 상업영화라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과정도 거쳐야겠죠. 다만 전 상업영화라고 해서 어떤 틀에 갇혀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그 안에서 대중과 소통할 접점을 찾는 건 가장 중요한 일이죠. 그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나갈 지점이에요.”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김학선 기자 (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