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를 위한 '경영권 방어제도' 넘어 개인·외국인 주주 설득할 수 있어야 지적
[뉴스핌=김선엽 기자] 삼성물산과 엘리엇의 공방 이후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이 재계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외국계 자본에 의해 우리 기업들이 공격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는 판단에서다. 여당은 이번 주 차등의결권 제도와 포이즌 필 도입을 골자로 한 법안을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2004년 SK-소버린 사태, 2006년 KT&G-칼 아이칸의 경영권 분쟁 이후에도 경영권 방어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재계를 중심으로 수차례 제기됐다.
하지만 관련 법안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대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싸늘한 여론 때문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일반적인 미국과 달리 우리는 대기업 집단의 총수가 순환출자를 통해 수십여 개의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다.
때문에 ‘경영권 방어=기업 총수의 지배구조 강화’로 귀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상당하다. "누구를 위한 경영권 방어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재계가 먼저 답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오너가 아니 주주 전체, 회사 전체를 위한 경영권 방어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 경제전문가 과반수, 도입 반대..‘지배주주 사익추구 악용 우려’
27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61개 대기업 집단(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중 총수가 있는 그룹이 총 41개다. 나머지 20개 중 공기업집단 등(12개)을 제외하고 총수가 없는 기업집단은 POSCO, KT, 대우조선해양, 대우건설, S-Oil, KT&G, 한국GM, 홈플러스 등 8개에 불과하다.
공기업에서 민간 기업으로 전환했거나 정부 기관의 지배를 받는 기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외국계 자본 소유다. 바꿔 말해 국내 대기업의 전문경영인이 대부분 그룹 총수나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는 의미다.
전문경영인이 전체 주주의 이익을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국내에서 경영권 방어에 대한 논의가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는 이유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 논란이 하루 이틀 된 게 아니지 않느냐”며 “어차피 이번에도 통과되기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뉴스핌이 경제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경영권 방어 도입’ 설문에서도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이 필요없다고 답했다.
특히 의결권 행사 주체인 금융투자업계 종사자 대부분이 부정적 의견을 피력해 눈길을 끌었다. 또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에 반대하는 이유로 6명의 응답자가 ‘지배주주 사익추구 악용 우려’를 꼽았다.
▲ 경영진, 전체 주주 아닌 총수 일가에만 ‘충성’ 경향
경영권 방어제도를 폭넓게 도입한 해외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차등의결권 제도, 포이즌 필 등의 부정적 활용 가능성이 불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총수 일가와 이사회 등 경영진이 보여준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우리의 경우 근대 기업의 역사가 짧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못 한 탓에 ‘회사는 오너가의 것’이란 공식이 자연스레 성립해 왔다. 이로 인해 전체 주주의 이익을 도모해야 할 경영진이 자신을 임명한 오너가에 대해서만 충성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경영상 비밀’이란 이유로 중요한 의사결정이 어떻게 단행됐는지 일반 국민은 물론 주주에게도 비공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영진은 주주가 아닌 총수와만 소통한다. 통상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소액투자자와 외국인 투자자가 회사 경영에 관해서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이에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쪽에서는 이 같은 경영문화가 먼저 개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강대섭 교수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하자고 하는데 똑같은 주식을 누가 가졌는가에 따라서 의결권을 차등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회사법 원칙에 비춰볼 때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며 “자칫 회사의 폐쇄적인 운영을 위한, 경영자와 오너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 측면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 자본시장 개방 23년..절대 다수인 외국인 주주 설득할 수 있어야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차이는 분명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총수 일가가 계열사 소유의 지분을 통해 수십여 개의 그룹사 전체를 지배하는 '로컬룰' 경영 방식이 글로벌 시대에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1992년 자본시장 개방 이후 외국계 자본이 물밀 듯 밀려왔고 현재 주요 대기업의 외국인 투자자 지분이 40~50%에 이르기 때문이다. 취약한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을 경우 또 다시 엘리엇과 같은 해외 투기자본에게 공세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출처 : 공정거래위원회> |
이에 일각에서는 경영권 보장 제도를 마련하기에 앞서 현재의 순환출자 방식의 기업지배구조를 먼저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문경영인이 오너의 관리감독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고 외국인 및 일반 주주와의 소통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실장은 “지배구조의 취약성에 대한 개선과 보다 주주친화적인 경영의사결정 문화가 정착된 이후에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반면 외국 자본의 투기적 공격 가능성이 잠재화된 현 시점에서 경영권 방어제도가 시급히 마련돼야 공정한 경쟁과 안정적 경영활동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공격적 성향의 펀드가 언제고 3%의 지분만 갖추면 상법상 소수주주권(임시주총 소집, 이사의 해임청구권, 회계장부열람권, 회사의 업무와 재산상태의 검사청구권 등)을 무기로 대상 기업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감사 선임 시 최대주주의 및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이 3%로 제한되는 점에 비춰볼 때 균형있는 공격·방어 수단이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비판도 관측된다.
신석훈 전경련 기업정책팀장은 “외국기업과 동등한 공격 및 방어수단을 갖추고 있어야 자본시장에서 공정경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김선엽 기자 (sunup@newspim.com)